0. 요약
기안84의 유튜브 채널 "인생84"에 출연한 이장우가 관련성의 격률을 위반 flouting 하면서 재치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아래 영상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https://youtu.be/fH7Bc0IOrzI?si=cMKVy2LnP5bcRfnF&t=100
(관심있는 대화는, 1분 40초부터 입니다)
기안84: 공부 좀 했어?
이장우: 전 어릴 때부터 일을 했어요
기안84: 아니 공부했냐고
이장우: 그니까 어릴 때부터 일을 해서 공부하고는 좀 거리가 멀었죠.
목차
1. 왜 격률 위반(flouting)인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좀 (잘) 했었냐는 기안84의 질문에 대한 이장우의 대답 "전 어릴 때부터 일을 했어요"는 관련성의 격률(Maxim of relation / Maxim of relevance)을 고의로 위반(flouting)한 사례이다. 이장우는 이 대답이 앞선 질문에 완벽히 관련된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대답을 하였고, 이렇게 한 것은 화용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이다.
2. 대화격률은 무엇인가
언어학의 분과 중 화용론(pragmatics)이 있다. 이론언어학의 다른 분과들이 맥락으로부터 다소 독립된 개별 문장/단어의 형태와 구조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화용론에서는 두 사람 이상의 대화 맥락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즉 언어가 의사소통에서 실제로 활용되는 양상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화용론자가 관심을 가지는 토픽 중에는 '체면'이나 '예의', '공손', '겸양' 등이 있다. 본인의 자존감이나 원만한 사회관계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사람들은 실제 언어생활에서 단순히 문자적으로 명령어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전략적으로 구사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바로 '체면', '예의'... 등등을 챙기기 위해서다. 그리고 화용론은 언어표현이 대화맥락에서 어떻게 전략적으로 사용되는지를 연구하는 분과이다.
어떤 때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너무 직설적이고 문자적인 언어표현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대화격률을 고의적으로 위반'(flouting a conversational maxim)한다. 둥글둥글하게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원만하게 사회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대화격률은 무엇일까? 대화격률은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할 때 암묵적으로 지킬 것이라고 전제되는 여러 사항들을 말한다. 그라이스 격률(Gricean Maxims)이라고도 한다. 기본적으로 격률에는 아래와 같이 4가지가 있다고 한다.
- 양의 격률(Maxim of quantity): 더도 덜도 말고 꼭 필요한 정도의 말을 한다
- 질의 격률(Maxim of quality):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근거가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 관련성의 격률(Maxim of relation): 대화 맥락에 적합한 말을 한다.
- 태도의 격률(Maxim of manner): 애매모호한 말을 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말한다.
네 가지 격률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대화할 때, 상대방이 대화 맥락에 적합한 말을 꼭 필요한 정도의 정보를 담아서 거짓 없이 논리적으로 말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지 않더라도 "너 왜 격률 안지켜!" 이런식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대신 "무슨 숨겨진 의미가 있구나" 하고 암암리에 생각한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과 달리, 격률은 별다른 일이 없으면 지킬 것이라 기대하는 사회적 약속 같은 것이다. 대화에서는 대화상대방이 격률을 지킬 것이 기대된다. 이를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교차로에서 파란불이 켜져있을 때 앞 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가리라는 암묵적 기대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 암묵적 기대는 100%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들어, 앞차가 위험을 감지했다면 신호등이 푸른등이더라도 감속할 것이다. 먼 곳에서 구급차가 삐뽀삐뽀하면서 오는 걸 보았다면, 푸른등에서도 멈출 것이다. 뒤차는 빵빵거릴 수는 있지만, 멈춰야 할 땐 멈춰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차로의 푸른 신호등과 같이 격률은 특별한 경우에 의도적으로 위배될 수 있다. 이를 flouting이라고 부른다. 격률을 flouting 하면 화용적 효과가 발생하고, 그걸 대화상대방이 감지할 수도 맞받아칠 수도 있다.
3. 격률 의도적으로 깨기(flouting)
다시 이장우와 기안84의 대화로 돌아가보자.
기안84: 공부 좀 했어?
이장우: 전 어릴 때부터 일을 했어요
공부했는지 안 했는지를 묻는데, 공부 이야기 대신 일 이야기로 대답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공부와 일을 모두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말해서 이장우는 '학창시절 공부'라는 대화의 맥락와 무관한 대답을 한 것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공부와 일은 상보적(동시에 할 수 없음)이라는 사회적 전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화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 라는 행간의 의미가 쉽게 읽힐 수 있다.
이장우가 격률을 깨뜨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자존감을 위해서이다. "나는 공부를 못했다"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체면을 깎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언어사용을 위해서는 의사전달을 하되 이렇게 애둘러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정보 (공부를 못했다) 를 행간에 담아 전달하되 겉으로는 체면을 깎지 않아도 된다.
4. 맞받아치는 기안84. 그리고 행간 드러내기
이어지는 대화를 더 보자.
이장우: 전 어릴 때부터 일을 했어요
기안84: 아니 공부했냐고
이장우: 그니까 어릴 때부터 일을 해서 공부하고는 좀 거리가 멀었죠.
기안84는 행간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라는 의미에서 "아니 공부했냐고"라고 다시 묻는다. 이때 이장우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라는 식으로 flouting 전략을 계속 유지할 수도 있다. 계속 flouting하는 예시로는 "아니 없어요" 밈이 있다. https://linguisting.tistory.com/54
하지만 이장우는 행간의 의미를 드러내주는 전략을 취한다.
"그니까 어릴 때부터 일을 해서 공부하고는 좀 거리가 멀었죠."
물론, "나 공부 못했어요!" 정도로 직접적인 발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행간에 완전히 담겨서 드러나지 않던 본래 정보가 조금을 드러난다.
이것은 한국어에서 관련성의 격률을 위반한 아주 유쾌한 사례이다. 그리고 격률 위반에 대해 기안84처럼 맞받아치는 것도 가능하다. 화용론의 렌즈로 바라보는 대화는 역동적인 게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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