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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분위기 언어학

낯-낮-낫 은 최소대립쌍인가요

sleepy_wug 2024. 2. 16. 04:27

 

시작하기 전에:
실시간으로 한국어 최소대립쌍 알려주는 '기계'에 대해서는 다른 글[링크]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최소대립쌍 개념 자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0. 요약

때로는 개념을 도입해서 복잡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늘 현상과 데이터가 우선이고, 개념과 이론은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관계가 뒤바뀌는 것은 주객전도이고 마치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과 같습니다.

 

최소대립쌍 개념을 배운 학생들이 '낮 낯 은 최소대립쌍인가?' 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은 최소대립쌍 개념에 대한 혼동으로 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도 개념과 현상 사이의 주객전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개념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
불필요한 개념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

 

목차

     

    1. 애초에 최소대립쌍은 왜 필요한가

    언어학에서 최소대립쌍 분석법은 '가장 작은 변별 단위'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입니다. 많은 경우, 음운론에서 음소와 음성의 차이를 배울 때 도입되는 개념입니다.

     

    아래와 같이 영어 단어 발음 세 가지가 있습니다.

     

    a. [kʰæ]
    b. [kʰæ]
    c. [kʰæ]

     

    이 세 단어는 모두 한 음절인데, 끝 소리가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언어의 화자들은 a. 와 b. 는 같은 단어로 인식하고 (cap), c. 는 다른 단어(cat)로 인식합니다.

     

    따라서 a-b 는 최소대립쌍을 이루지 않지만 a-c, b-c 는 최소대립쌍을 이룹니다. 더 나아가 의미차이를 유발하지 않는 [pʰ] [p̚] 는 이음(allophones) 이라고 부르고 [pʰ]와 [p̚]라는 개별적 소리를 초월하여 의미를 담당하는 추상적 양순음을 상정하여 이를 음소(phoneme)라고 부릅니다. 영어 철자법은 대체로 음소적 표기를 하고, 이 '추상적 양순음'은 p 라는 철자로 표기합니다. a.와 b.를 철자로 쓰면 둘 다 "cap" 입니다.

     

    사실 최소대립쌍은 음운론에서만 사용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음성음운론의 아주 반대쪽(?)이라고 여겨지는 화용론에서도 아래 예문과 같이 최소대립쌍을 이용한 논증이 가능합니다.

    1. 진지 잡수셨어요?
    2. 밥 먹었어?

    문장1과 문장2는 '공손성'의 측면에서 최소대립쌍을 이룹니다. 

     

    최소대립쌍을 이용한 두 사례의 공통점은 '현상적' 실체와 '추상적' 개념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언어를 사용하면서 보는 것은 음절말 자음 발음이나, '진지', '밥', '잡수시다', '먹다' 등등 구체적 실현상입니다. 그러나 언어학은 이런 현상으로부터 '음소'나 '공손성'의 개념을 도출해냅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것이 최소대립쌍 논증입니다. '음소'나 '공손성' 이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고 다만 '상정될 따름'이라는 것'을 주의하세요. 간혹 최소대립쌍을 "음소가 달라 의미가 구분되는 두 단어" 등으로 이해하는 것을 보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최소대립쌍을 통해 알게되는 '음소'라는 개념이 정의에 들어가는 순환논증이기 때문입니다.

     

      현상 추상
    cap-cat [p̚ pʰ tʰ] 음소
    진지-밥 진지~밥, 잡수시다~먹다 등등 공손성

     

     

     

    2. 낯-낮-낫 의 경우

    그렇다면 낯, 낮, 낫의 경우는 어떠한가요? 누군가 착각하는 것처럼, "ㅊ,ㅈ,ㅅ 는 한국어에서 음소이므로 낯낮낫은 최소대립쌍" 인가요?


    우선, 낯 낮 낫의 발음을 IPA로 표기해봅시다. (아래 IPA는 한글을 넣으면 IPA로 자동 변환해주는 툴을 이용했습니다)


    a. [nɑt]
    b. [nɑt]
    c. [nɑ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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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적 현상이 어떠한가요? 좀 더 쉽게 말해서 우리 귀로 들었을 때, 혹은 녹음하여서 기계로 분석했을 때, "낯낮낫" 발음에 차이가 있나요?

     

    유의미한 음성적 차이가 없기 때문에 낯낮낫이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즉, 조사가 안 붙은 독립형으로 나타날 경우) 에는 변별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들 중 어떤 쌍도 최소대립쌍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동음 이철 이의어'라고 하는데, 소리가 같고(동음), 철자가 다르고(이철), 의미도 다른(이의) 단어군입니다. 마치 영어의 sea see 차이와 같습니다. 둘다 [siː]로 발음됩니다.

     

    그러나 왜 sea, see에 대해서는 동음이의어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낯 낮 낫의 경우는 그것이 어려울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낯 낮 낫의 차이가 쉽게 복원 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뒤에 조사 '-이'를 붙여보면 아래의 1-3와 같습니다. (표준발음을 전제했습니다.)

     

    1. [tɕʰi]
    2. [i]
    3. [si]

     

    어떤가요? [나치], [나지], [나시]로 변별이 되고, 한국어 화자라면 이것을 '낯이', '낮이', '낫이' 로 분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경우, 1-3은 최소대립군(minimal set)[각주:1]을 이룹니다. 빨강으로 표시된 부분의 차이는 오직 하나의 소리 차이인데, 이 하나의 차이 때문에 의미차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낯낮낫"은 최소대립쌍을 이룰 수 없지만, "낯이,낮이,낫이"는 이룰 수 있습니다.

     

    2.1 덧붙임: 잠자리-잠자리

    그렇다면 곤충 '잠자리'와 침대 '잠자리'는 어떠한가요?

     

    ㄱ. [tɕɑmɑɾi]
    ㄴ. [tɕɑmtɕ*ɑɾi]

     

    IPA를 읽을 줄 아는 한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ㄱ이 곤충([잠자리])을 의미하고 ㄴ는 침대 등([잠짜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자면, 중요한 것은 분석하고자 하는 현상(즉, 발음)과 관심있는 단위(즉, 음소)입니다. 잠자리-잠자리 가 철자가 같건, 내부의 형태론적 구조가 어떻든, 사잇소리가 들어가건, 역사적 발전양상이 어떻건 간에, 최소대립쌍 분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발음 상 변별되는지와 오직 한 소리 단위로 인한 것인지입니다. 발음상 두 단어는 변별되고 평음과 경음의 차이로 인함입니다.

     

    한국어에서 이 두 단어는 평음인지 경음인지에 따라 의미차이를 유발하는 최소대립쌍입니다.

     

     

    3. 결론

    현상이 먼저 있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개념과 이론입니다. 예를 들어서 '포유류는 육지에 산다' 라는 (잘못된) 일반화와 이론이 있다고 칩시다. 이런 이론이 있다고 해서 그걸 들이대면서 '고래는 물에 사니까 포유류가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론을 정해놓고 현상을 짜맞추는 것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일 따름입니다.[각주:2]

     

    낯-낮-낫 의 경우도 "음소 차이(사실상 철자 차이)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의미가 변별된다"라는 결론을 이미 정해놓으면 안 됩니다. 현상(실제 발음)을 독립적으로 관측해야 하고, 발음에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 (없음), 그리고 만약 발음 차이가 있으면 의미차이를 유발하는지를 솔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철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글 표기는 많은 경우 혼동을 줍니다. 그 이유는, 우선 "한글 만능론" 등의 미신이 팽배하기 때문이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글표기는 음소를 투명하게 나타낸다"라는 '희망사항'에 기대어 한글로 써있는 것이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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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 단어가 아니라 세 단어이므로 쌍(pair)이 아니라 군(set) [본문으로]
    2.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자신의 집에서 밤을 보내게 대접하는데, 만약 나그네의 키가 자신의 침대보다 크면 나그네의 다리를 침대에 맞게 잘라내고, 만약 나그네의 키가 자신의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길이에 맞추어 나그네의 손발을 늘려버립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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