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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분위기 언어학

시부모 앞에선 남편을 '걔'라고 불러라?

sleepy_wug 2023. 1. 1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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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요약

언어는 마치 생물의 진화와 같이 늘 변화합니다. "요즘 것들은..." 식으로 다음 세대의 언어를 제약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세대의 언어는 죽고 차세대의 언어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Copyright free image: gaslighting

 

1. 

    언어 예절을 잘 지키자면, 칭호와 호칭을 정확하게 구별해서 써야 할 터인데, 요사이 젊은 세대는 이에 대해서 전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으며, 여러 세기 동안 지켜져 오던 우리의 전통 언어 예절은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73]년 봄[각주:1] 결혼 직후의 며느리를 불러 놓고, 앞으로 시부모 앞에서는 남편을 '걔'라고 지칭(指稱)해 말하도록 타일렀더니 어떻게 차마 남편을 '걔'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난색을 보였다. 어디 그뿐이랴! 대학을 졸업했다는 며느리가 남편 이름 밑에 '씨(氏)'를 붙여서 '철수 씨, 태식 씨' 하기가 일쑤이다.
    '걔'란 말이 쓰이는 범위는 넓다. 직계 존속 앞에서 남편이 아내를 가리키는 말로만 쓰일 뿐 아니라, 아내가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또 시부모나 시조부모에게도 써서 좋은 말이다.

 

위 글은 한갑수(1913-2004) 선생이 1989년 <국어생활>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오늘날 시점에서 보았을 때 며느리의 언어생활을 단속하는 것은 명백한 가스라이팅이고, 심지어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 전(즉 1990년대)에 이미 사문화된 용법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또한 문장 상 남편이 '철수'와 '태식' 이렇게 둘이라는 여성비하적 암시도 명확하다.[각주:2] 다만 이러한 부분은 글쓴이가 별 생각없이 글을 써서 시대상에 물든 것으로 보아 깊게 읽을 필요는 없을 테다.

다만 주목할 만한 부분은 두 가지.

1. 남편, 시부모, 시조부모를 '걔'로 지칭하는 것이 규범적으로 옳다는 주장
2. 남편 이름 뒤 의존명사 '-씨'를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

 

불과 한 세대 무렵 전에 쓰여진 글인데도 오늘날의 언어감각과 상당히 다르다. 그만큼 한국어의 존대 존칭 문제는 변화가 빠르고, 변화가 빠르다는 것은 사회언어학적으로 연구될 게 많다는 뜻이겠다. 나는 사회언어학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글에서 묘사된 한국어의 양상과 오늘날 사용되는 한국어와의 비교에 관하여 스케치만 간단히 남긴다. 

 

참고로 며느리에게 "남편을 걔라고 불러야 한다"고 타박하던 한갑수 선생은 1913년 생, 그러한 타박을 들으며 "난색을 표하던" 며느리 박화서 교수는 1953년 생이다.

 

 

2. 압존법의 흔적: "아버님! 걔가 직접 오겠답니다."

    [73년] 봄 결혼 직후의 며느리를 불러 놓고, 앞으로 시부모 앞에서는 남편을 '걔'라고 지칭(指稱)해 말하도록 타일렀[다.]

 

이 글대로라면, 73년 봄 당시 '기성세대'의 언어에서는 시아버님과 대화할 때, 남편을 두고 '걔'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압존법으로 설명이 된다. 시아버지가 남편보다 높은 사람이므로, 시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남편을 언급할 때는 남편을 낮추어야 한다는 요지다. 

 

또한, 73년 봄의 '신세대'(얼추, 50년대 출생자? 실제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며느리는 박화서 명지대 교수로 1953년 생) 들은 적어도 이러한 정도의 압존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것은 갈등의 단초가 된다. (또한 한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50년대 출생자가 어른들에게 혼날 때 "난색을 보일" 정도로는 반항을 했다는 것.)

 

그러나 3인칭 대명사로 사용된 '걔'가 영 어색하다. 며느리가 난색을 보이는 까닭이 압존법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압존법과는 무관하게 3인칭 대명사 '걔'의 용례가 이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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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칭이 되어버린 '걔'

현대한국어의 3인칭 대명사는 좀 애매한 면이 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3인칭 대명사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은 서구언어에 한국어를 끼워맞추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근대화 과정에서 '그'와 '그녀'가 (특히 서구언어로 된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만들어진 표현이라는 점이 있다. 현대한국어에서는 대명사가 들어갈 자리에 아예 생략하거나, 아예 이름이나 기타 일반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예컨대 어떤 학생이 자신과 같은 반 친구인 "김민지"를 지칭하는 맥락이라고 치자. a에서 d 순으로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a. "그녀는 학교에 갔습니다."
b. "그 친구는 학교에 갔습니다."
c. "김민지는 학교에 갔습니다."
d. "민지는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상황에서 주어에 대명사 '걔'를 사용한다고 해보자. 아래와 같은 문장을 말한다.

e. " 걔는 학교에 갔습니다."

 

우리의 한갑수 선생은 위의 e와 같은 문장이 아주 중립적인 문장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e에서 비칭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화자와 "김민지"가 무척 가까운 사이이거나, 화자가 "김민지"를 비하하는 상황이다.

 

만약 한갑수 선생이 며느리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이 1970년대 당시의 언어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실이라면, 시 정도 시점에서 '걔'의 비칭화가 완전히 진행된 것이 아닌가 한다. 네이버 뉴스 아카이브 (https://newslibrary.naver.com/)를 통해 확인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추측만 할 따름이다.

 

 

 

4. 이름 뒤에 쓰는 의존명사와 언어변화2: 프리퀄 

어디 그뿐이랴! 대학을 졸업했다는 며느리가 남편 이름 밑에 '씨(氏)'를 붙여서 '철수 씨, 태식 씨' 하기가 일쑤이다.

이름 뒤 의존명사의 사용에 관한 이전 글이 트래픽이 꽤 잘 나와서 이 섹션을 추가한다. 1910년 생 한갑수 선생은 "대학을 졸업했다는 며느리가" 남편 이름에 -씨 붙여 호칭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각주:3]

 

이전 글에서 적은 바 있으나, 한국어에서 이름 뒤에 쓰는 '-씨', '-분', '-님' 등의 의존명사의 선택은 세대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요약하자면, 1980년대 생인 나의 입장에서, '-씨'는 원래 사용되고 있었고, '-님'은 우리 세대부터 쓰기 시작했고, '-분'은 나보다 후속세대에서 사용한다. 현재 시점에서 기성세대(즉, 40대 50대)에게는 '-님' 붙이는 것이 어색하다고 한다.

 

그리고 프리퀄. '-씨' 조차 어색한 세대의 출현!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의 기성세대는 아무리 꽉막힌 국어학자라 해도 "대학까지 졸업한 사람들이 이름뒤에 "-분"을 왜 붙이냐?" 따위의 고나리질은 안한다. 아마 우리세대도 다음세대의 '-분' 사용을 놓고 그 사람의 학력이 어쩌니 이딴 소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정도만 해도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하나?

 

 

5. 결론

언어는 늘 변화한다. 세종대왕을 숭상한다면서 중세국어로부터 이역만리 떨어진 자신의 언어는 생각하지 않고, 차세대의 언어가 자신의 언어에서 고작 한발짝 떨어졌다고 노발대발하는 것은 정말 객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속세대는 거기에 답할 필요가 없다. 다만 미소지으며 속으로 '지랄하네!'라고 생각하면 된다.

 

입모양만 봐도 알겠으니 자막은 안 달게요.ㅋㅋ

 

결국 후속세대의 언어가 표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 글이 씌어진 1989년으로부터 고작 34년이 지났을 따름이다. '걔'가 더이상 중립적인 대명사로 사용되지 않고, '-씨'를 이름 뒤에 붙이는 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딱딱한/사무적인) 표준이 된 지 오래이다. 2023년의 10대 20대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국어원이 뭐라고 규범을 들이대던 그들은 답할 필요가 없다. 다만 미소지으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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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에는 63년 봄이라고 적혀있으나, 사실관계 상 73년을 의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갑수 선생의 장남 한상대 교수의 며느리는 박화서 명지대 교수인데, 1953년 생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어떤 여자, 특히 매력적인 여자를 두고 명목상의 남편말고 샛서방(실제 남편)이 여럿 아니냐는 농담은 한국어에서 역사가 깊다. 밤에 세탁기 돌리는 걸 '샛서방 빨래'라고 하는 등을 말한다. 사실 한국만의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고대사회에서는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성경에도 나온다.(요한복음 4장 18절) [본문으로]
  3. 특히 "대학을 졸업한"이 아니라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라는 표현은, 며느리의 학력을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주장"의 영역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고약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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