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흥미로운 시를 접했습니다. 통사론에서는 주어와 동사가 중요하고 부사어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시(詩)는 부사어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시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시를 소개하고, 부사어를 사랑하는 통사론 연구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목차
1. 박상천 시 - 통사론
통사론(統辭論)
박상천 詩
주어와 서술어만 있으면 문장은 성립되지만
그것은 위기와 절정이 빠져버린 플롯같다.
'그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라는 문장에서
부사어 '우두커니'와 목적어 '그녀를' 제외해버려도
'그는 바라보았다.'는 문장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는 바라보았다.'는 행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나 서술어가 아니라
차라리 부사어가 아닐까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에는
눈물도 보이지 않고
가슴 설레임도 없고
한바탕 웃음도 없고
고뇌도 없다.
우리 삶은 그처럼
결말만 있는 플롯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힘없이 밥을 먹었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밥을 먹은 사실이 아니라
'힘없이' 먹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
(출처: https://raincat.com/poem/3069 )
이 시는 아름답지만, 저는 문학을 공부하지 않죠. 대신 이 블로그의 취지에 맞게 '언어학'해보겠습니다.ㅋㅋㅋ
2. 아마도 논항과 부사어?
위 시에서는 주어와 서술어를 묶어서 한 쪽 그룹에, 부사어를 다른 그룹에 두어서 마치
[주어 + 서술어] vs [부사어]
의 대조가 있는 양 표현하였지만, 사실 통사론에서 부사어에 대립되는 개념을 찾으려면 논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냥 대충 봐도, "그는 힘없이 밥을 먹었다" 가 주어와 서술어와 부사어로 되어있다고 시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밥을'은 목적어(대격)가 아닙니까? 마치 시에서는 "그는"과 "먹었다"가 통사론(혹은 언어이론)의 총애를 받고 "힘없이"가 대조되고 무시되고 있다고 구도를 펼치지만 그 와중에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목적어 "밥을"이 있네요.ㅠㅠ
아마도 시인이 의도한 대조는 논항 ("그", "밥") 과 부사어 ("힘없이") 사이의 대조가 아닐까 합니다.
3. 정말 통사론은 부사어를 무시하나?
그런데 정말 시인의 생각처럼 통사론에서는 부사어를, 말그대로 군더더기로 생각하고 문장 구성에 하등 쓸모없는 것으로 무시할까요?
서술어에 따라 문장 내 부사어가 빠질 경우 비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부사어를 필수부사어라고 합니다. '다르다, 잡히다' 등의 술어가 이러한 서술어에 해당하는데, 아래 예시에서 빨간색 볼드체 부사어가 빠지만 문장이 어색해집니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 (이노래)
쥐가 고양이에게 잡혔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Cinque (1999)는 통사론의 각 기능핵(Functional Head)이 취할 수 있는 부사어의 종류가 다르다는 주장을 제시합니다. 이 주장의 주된 근거는 부사어의 배치 순서와 관련있습니다. 다음 문단에서 한국어 예시를 제시하지만, 통사적으로 높은 위치의 기능핵이 취하는 부사어가 어순 상 앞에 나와야만 문법적입니다. 뿐만아니라 어떤 통사단위에서 어떤 부사어의 사용은 비문법적이고 다른 부사어는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1주어진 문장 속에 특정 기능핵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으로 부사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Lee (2000)는 Cinque 1999의 관찰을 한국어에 적용했습니다. 아래의 예시를 보면 부사어의 순서에는 제약이 있습니다. 문장 앞의 별표(*)는 비문법적이라는 뜻입니다. 2
- a. 여름에 철수가 보통 자주 바다에 간다.
b. *여름에 철수가 자주 보통 바다에 간다. - a. 그 이후로, 철수가 더 이상 항상 못 이긴다.
b. *그 이후로, 철수가 항상 더 이상 못 이긴다.
위의 두 문장쌍을 보면 부사어 "보통"과 "자주" 사이에는 항상 "보통"이 앞에 나와야 하고, "더 이상"과 "항상" 간에는 항상 "더 이상"이 앞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해당 부사어들이 통사 구조 상 [f2P 보통 [f1P 자주 ... f1 ] ... f2 ] 와 같이 다른 기능핵 f1 f2의 phrase 내에서 기저생성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사어는 상승 이동할 수 있습니다. 1a 문장에서 부사가 문두로 이동하여서 "보통 여름에 철수가 자주 바다에 간다" 로 표현하여도 문법적입니다. 그러나 부사의 분포가 반드시 자유로운 건 아닙니다. 구조상 아래에 있는 자주 가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문장 처음으로 날아가면 안 됩니다! "*자주 여름에 철수가 보통 바다에 간다" (혼란하다 혼란해)
- a. 보통 여름에 철수가 자주 바다에 간다.
b. * 자주 여름에 철수가 보통 바다에 간다.
또한 Lee 2000에는 아래와 같이 한국어에서 부사어 '잘'의 분포가 제약적이라고 보고합니다.
4.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 통사론은 부사어를 시보다 더 사랑한다.
시 '통사론'은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라는 행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통사론도 부사어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통사론은 시보다 부사어를 더 사랑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3
어떠한 대상을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가라고 할 때, 멋있고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라면 그건 시인의 사랑이겠지만, 반면 통사론자의 사랑은 그 대상이 좋아하는 게 뭔지 싫어하는 게 뭔지, 언제 나타나고 언제 못 나타나는지 등등 그 대상에 대해 더 알아내고 정리하는 것이 아닐까요?
시인이 부사어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음과 같이 부사어를 시에 호명해주는 것 뿐이겠지만,
그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힘없이 밥을 먹었다
아마도 통사론자라면 그 부사어가 어디에 있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즉, 어느 통사단위에서 기저생성되었는지) 등등을 궁금해하고 알아내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정말 누군가에 대해 관심이 있고 그 대상을 사랑한다면 아래처럼 다른 친구랑 어울릴 때 어떤 건 좋고 어떤건 나쁜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래의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아마도 시에서 사용된 부사어 "우두커니"와 "힘없이"는, 부사어 "항상"이 생성되는 단위보다 작은 통사단위에서 온 것 같습니다.
그는 항상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는 우두커니 항상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힘없이 밥을 먹었다.
* 그는 힘없이 항상 밥을 먹었다.
5. 결론
"갑자기 분위기 언어학" 카테고리에 있는 다른 글들이 그러하듯 이 글도 그냥 재미있자고 쓴 글입니다, 다만 언어학을 한스푼을 곁들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재미로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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