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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분위기 언어학

음절화는 쉽지 않아요

sleepy_wug 2024. 2. 12. 12:22

 

0. 요약

시중에 이런 책이 있나 봅니다. 신박하게 기운빠지는 책이라 소감을 몇 자 적어봤습니다.

 

 

목차

     

     

    책표지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06537648

    1. 호기심

    한글에 기대어 영어발음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게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글은 표기심도가 얕고 표음성이 좋다보니, 일면 효율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걸음마 할 때 지지대를 쓰듯 한글을 영어발음을 익히는 중간과정으로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이 심정적으로 매우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글로 모든 말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한글만능론' 등의 유혹도 쉽습니다. '유혹'이라고 적은 이유는 '유사언어학'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흥미롭고 기발한 점은 한글의 표음성에 더하여 음절 개념을 접목시켰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흥미로워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출판사에서 블로거 동원한 홍보를 했는지 많은 블로그와 인스타 포스팅이 검색되었습니다. (이 글은 광고가 아닙니다)[각주:1]

     

    그런데 호기심에 웹상의 글 이것 저것 읽다보니 상당히 김이 빠지고 현타가 오더군요. '한글만능론' (특히 민족주의와 결부된)이 온라인 상에서 유행하는 것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면역(?)이 될만도 하지만, 이건 너무 신박해서 방어력이 없었나봅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언어학의 다른 분야보다는 음소배열론(언어는 개별적 음소를 조립하여서 음절, 단어를 어떻게 만드나)과 차용어음운론(언어를 넘나들며 단어를 빌려오기)을 더 고민했기에, 개인적으로 음절과 음절화 관련 토픽으로 씨름을 해와서 더 대미지가 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ㅎㅎ

     

    그래서 그냥 허심탄회하고 짧게 제 소감을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요컨대 음절(화)와 '한글로 표기한 영어발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책으로 도움을 받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단순히 문자뿐만 아니라 음성파일 등을 제공하는 점은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2. 음절은 복잡해요. 그 복잡성 왜 굳이?

    사실 저는 차용이든 (한국인에게) 영어발음교육이든 음절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불필요한 복잡성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발음교육은 하나도 모릅니다.

     

    애초에 음절개념을 모든 연구자들이 다 받아들이지 않고(놀랍죠? 저도 놀랐어요. 음절이 '논쟁의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거든요) 음절을 인정하더라도 한국어나 중국어처럼 우연히 기저형에 단음절 형태가 많은 언어들에서야 직관적이지 영어는 그런 언어가 아니기도 하고요. 심지어 한국어의 경우 음절형을 기저로 상정하는 이론도 가능하지만 영어의 경우는 그렇게 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각설하고 영어에서 (그리고 아마도 어떤 언어에서든) 음절화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면 다 양보해도 두 가지 개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Maximal Onset Principle (최대두음원리)

    Sonority Sequencing (공명도 순차)

     

    한국어야 '우연히' 음절핵 앞뒤로 자음이 최대 1개씩만 올 수 있으니 대충 모음 골라잡고 그 앞뒤에 최대 자음 하나만 적당히 묶어서 음절화하면 되니 좋지만, 그건 우연일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어가 (1) 음절화를 단순히 '모음 있고 그 앞에 자음들을 적당히 묶는다' 정도로 퉁칠 수 없고, (2) 더 나아가 한국어 음절(이 책에서 말하듯, 블록 형태의 한글)로 매핑되기 어렵습니다.

     

     

    (1) 의 문제는 바로 위에 보듯 잘못된 음절화로 드러납니다. 저희 커리큘럼에서는 빠르면 1학년, 늦으면 2학년에 음절 개념을 가르치면서 Maximal Onset Principle을 다루는데, 그 원리를 가르치면서 '잘못된 예시'로 위 사진과 같은 것을 제시합니다. woman과 salad의 음절화가 MOP를 어긴 전형적 사례인데, 각각 [wʊ.mən]과 [sæ.ləd] 가 타당합니다.[각주:2] 사실 음절화 과제내주면 영어 백그라운드의 학생들은 많이 어려워하는데, 실수의 양상은 [dɑkt.əɹ] 처럼 형태론적 단위(이 경우 접사 -er)에 이끌리는 게 빈번합니다. 따라서 woman을 wom-an 과 같이 음절화한 것은 특히나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2) 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사실 한국어와 영어 사이의 매핑이 그나마 음소 차원에서 가깝고, 더 높은 구조로 갈수록 멀어진다는 점에서 저는 영어발음교육에서 음절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어떤 단음절은 한국어의 음절 하나로 매핑되고 (예: cap 캡) 다른 단음절은 한국어의 음절 하나로 매핑될 수 없습니다 (예: strike).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meatball은 미트볼인가요 볼인가요. 왜 그런지를 설명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장치가 Sonority Sequencing과 [+/- cont] 자질, 그리고 한국어 말음의 불파성 정도일텐데, 이런 개념들을 도입하는 것은 빈대잡자고 초가삼간 태우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음절에서 한단계만 더 올라가 볼까요? acme는 "액미"로 적을텐데 발음은 [앵미]가 됩니다. acme의 발음은 [앵미]인가요? Henry는 헨리로 적고 발음은 [헬리]인지 [헨니]인지 모호합니다. 한글을 사용함에 따라 불필요하게 한국어 음운 규칙을 적용할 위험을 초대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요? 저는 영어교육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뭐 다 좋고 영어 표현을 음절 단위로 툭툭 끊어서 공부한다 합시다. 이런 접근법이 비효율적인 이유는 liason과 문장 구성에 따른 intonation을 위해 다시 새로 공부를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축약도 빈번합니다. probably를 [prɑ.bə.bli]로 잘 음절을 나눠서 배웠다 칩시다. 실제로 이 형태를 만나거나 발음할 일은 없습니다. Buckeye Corpus에 보니 가장 흔한형태가 [prɑ.bli]와 [prɑ.] 등입니다. 음절화를 훈련해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차라리 영어 음소 각각을 한글 자모로 근사하는 (그리고 이 책에서 비난하는 것으로 보이는) 소위 '파닉스' 책들이 더 정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파닉스 이론을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3. 비난만 하고 끝날건가요?

    무분별한 비난이고 대안없은 말잔치가 될까봐 걱정되어서, 비록 영어교육 전공자는 아니지만, 사춘기 이후 영어학습을 했던 된장발음의 한국인으로서 제가 테이블에 내놓을 수 있는 작은 조언을 남겨보고자 합니다. 아마도 큰 단위에서 작은 단위로, 즉 초분절 단위로부터 시작해서 음소로 내려오는 게 타당하지 않겠느냐 입니다.

     

    사실 영어 음소의 경우 아주 전형적인 파열음에서 멀어질수록, 즉 /s/, /ʃ/, /ɹ/ /w/, /j/ 등으로 갈수록 영어 내에서의 편차 자체가 매우 큽니다. 뭐가 정확한 목표발음인지조차 불확실해집니다. 뭐, 한국 교육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남부 캘리포니아발음으로 고정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밀어붙이기에는 한국인들은 서핑보다는 공부나 일을 할 때 영어를 쓸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농담) 

     

    제 생각에 개별 음소의 정확한 조음(그게 뭐가 됐건 간에)보다 중요한 것은 초분절 자질 쪽인데, 위에서 언급했듯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는 초분절 쪽에 더 크기 때문에 '발음실수'도 잦습니다. '발음실수'라 함은 아시안 억양 티난다 이런 말이 아니라 '소통을 방해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누차 논문으로 증명되는 것은 한국인들의 영어에서 stressed unstressed 변별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고, (특히 경기방언화자의 경우) monotoneous tone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음절화는 동아시아 언어 백그라운드를 가진 학생들이 아주 직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영어 문장 녹음된 것을 듣고 허밍으로 따라하는 것부터 훈련하는 게 더 유익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리의 높낮이, 크고 작음은 포착하기 쉽고 따라하기도 쉬울 것이기 때문에 음소차원에서는 저해상도더라도 이렇게 시작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차 말하지만 저는 영어교육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 분야 전공자 선생님들의 비판을 기다립니다. 이런 방법론 쓰는 것으로 얼핏 떠오르기로는 20년전쯤 유행했던 American Accent Training 생각나네요. 네. 저 노땅이에요. 아니요. 그 책 홍보 아니에요. 기회된다면 그책은 더 신랄하게 깔 자신 있어요. 우선 그 책은 IPA도 안쓰거든요.)

     

    저자와 출판사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을 것이기에, 아마도 이 책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포스팅들도 여기서 제시하는 게 좋아보이네요. 다락원의 네이버 포스팅[링크]를 참조해주세요! 

     

    물론, 궁극적으로 저는 음운론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전공자이기 때문에?) 소위 '버터발음 만들어주는 발음교육'에 아주 많이 무척 진짜 매우 너무 회의적입니다. 버터발음 아니면 어떤가요? 애초에 국제어 지위 누릴 거면 외국어 배우는 대신 발음의 다양성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영어 화자 쪽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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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출판사 얘기가 나온김에, 다락원에서 나온 책이네요? 다락원 일본어 교재들 참 유익했었는데... [본문으로]
    2. 두 단어 모두 한국어로 차용표기가 빈번한데, 각각 '우먼'과 '샐러드'('사라다')로 사용됩니다. 제대로 음절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m/과 /l/을 제1음절의 말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학습을 통해 극복해야 할)평균보다 퇴행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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