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Pandemic을 한국어로 표현할 때 나는 판데믹이라고 해왔는데, 한국 사회에서 더 통용되는 표현은 팬데믹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차용어음운론의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다.
1. Pandemic
국제보건기구 WHO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19를 'pandemic' 으로 선언한 것은 2020년 3월이었다.
Pandemic 선언을 보도하는 언론보도에서부터, 진작에 pandemic의 한국어 차용은 발음을 차용하는 것으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즉, '범유행'이라든가 '세계적 유행' 등의 의미차용이 아닌, 이 영어단어의 발음을 차용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정부 공식발표나 언론보도에서 사용하는 차용어 표현은 '팬데믹'이다. 그러나 나는 타당한 이유로 '판데믹'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판데믹이 아닌 팬데믹으로 귀결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Pandemic 은 제2음절에 강세가 있다. 나의 발음을 전사하자면 [pʰən.ˈdɛ.mɪk̚] 정도이다. Merriam-Webster에서 보면 /pan-ˈde-mik/ 이라고 발음을 표기한다.
강세를 받는 2음절 모음 /ɛ/ 혹은 /e/를 어떻게 차용할지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을 것이다. 명백하게 ㅔ이다. 영어 전설고모음 /ɪ/ /i/ 역시 대체로 한국어의 /ㅣ/ 모음으로만 mapping되므로 문제가 없다.
문제는 첫번째 음절이다:
강세를 받지 않는 첫번째 음절 모음을 ㅏ로 차용하면 '판데믹'
그 모음을 ㅐ로 차용하면 '팬데믹'.
나는 '판데믹'이 한국어의 전통적인 차용방식에 가깝고, '팬데믹'이 엘리트주의적인 (일방적/하향적) 차용방식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2. 유사사례 애플리케이션 vs 어플리케이션 그리고 지놈 vs 게놈
영어단어 application의 차용은 pandemic 차용과 유사한 사례인 것으로 보인다. Application은 애플리케이션 혹은 어플리케이션으로 차용된다. 줄여서 표현할 때, 각각 '앱' 혹은 '어플'이 된다.
Lee (2021)은 어플, 앱, 어플리케이션, 애플리케이션의 차용양상을 사회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이 논문에 따르면, 고학력자 및 영어노출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ㅐ/ 모음을 사용한 '애플리케이션'과 '앱'을 선호하고 그 이유는 '그 표기가 원어에 더 가깝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한다. 1
시간을 좀 더 과거로 돌려 200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보면, genome의 차용에서도 비슷한 갈등 내지는 변이가 존재했다. Genome을 어떤 사람/언론들은 '게놈'이라고 차용했고, 다른 사람/언론들은 '지놈'이라고 차용했다. Application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위 엘리트층일수록 '지놈'을 선호했다.
(노파심에 적자면 여기서 엘리트층이라 함은 과학자들 등 실제로 관련 연구에 관여하는 사람이 아니다. 훈수두기 좋아하는 자폐적 엘리트들을 말한다. 평민-부르주아 의 구분을 나누고 스스로를 '부르주아'라고 칭하며 '평민'을 '계도'해야 한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정리하자면 앱-지놈 vs 어플-게놈 의 대립선이 될 것이다. Pandemic의 차용인 팬데믹 vs 판데믹은 이 대립선에서 각각 어느 쪽에 서는 것일까?
3. 애매할 땐 설명서를 보세요
이처럼 한국어의 영어 차용에서는 변이가 많이 나타나고 하나의 정해진 패턴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변이는 음향적으로 불확실한 부분에서 발생한다는 것이고, Daland, Oh, and Kim (2015) 에서 발견한 것처럼 이렇게 불확실한 부분에서는 철자의 영향이 나타난다. (이 논문은 제목부터 "When in doubt, read the instructions" 란다. 제목 잘 지었다.) 2
다시 pandemic의 차용으로 돌아오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세를 받는 제2음절은 확실히 '데'로 차용되고 제3음절은 '믹'이다. 불확실한 부분은 제1음절이다. 따라서 1음절의 차용을 위해서 설명서(철자)를 보면 pan- 이므로 '아프리카' (←africa ) 혹은 '판타스틱' (←fantastic) 등의 사례에 따라 a를 '아'로 차용하는 것은 타당해보인다.
혹은 1음절의 차용도 애매하지 않고 "특정한 차용이 원어에 가깝다는 강한 확신"이 있다면 설명서(철자)를 안 볼 수도 있겠다. 그런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지놈'과 '애플리케이션'을 한국어 렉시콘에 포함시켰고 특히, '어플'보다 '앱'이 더 원어에 가깝다 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pandemic의 경우도 팬데믹 이 원어에 더 가깝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4. 규범적으로 '옳은' 답은 없다.
지놈이 통용되지 못하고 게놈이 자리잡은 20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팬데믹이 통용되고 판데믹은 자리를 잡지 못한다. 어쩌면 팬데믹이 거의 독자적으로 한국어 렉시콘에 안착하는 느낌이다. 아마 20년 후에 2020년대를 되돌려 분석한다면 pandemic의 차용은 모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원어의 정보가 애매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앱-지놈과 결을 같이하는 엘리트 형 '판데믹'이 한국사회에 통용되게 된 것은 일견 놀랍다. 어쩌면 규범주의적 폭력집단(국립국어원) 이나 정부가 이전보다 더욱더 게이트맨의 역할을 하고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대변하기 때문이 아닐까?
5. 그닥 상관없는 여담
20년 전까지만 해도 '국어원'은 보고서에서 "88년 표준어 규정 입안이 없었어도 분명 어떠한 형태의 한국어 방언이 공용어로 쓰였을 것이다"라고 겸손했다. 그러나 '국어연구원'이 '국립국어원'으로 탈바꿈하자 어느 순간부터 한국어를 독점한 점령군행세를 한다.
"현대의 문명국가라면 공용어 또는 표준어가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 표준어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 중심지에서 쓰이는 방언이 표준어 역할을 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말 그러하다. '국립국어대사전'과 한국어 렉시콘은 동치가 될 수 없고, '표준어규정'은 한국어 문법이 아니다. 한국어는 '국립국어대사전'에 수록된 단어를 '표준어규정'에 따라 조합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애초에 국어대사전 프로젝트도, 표준어규정 프로젝트도 언중의 언어생활에 대한 '기술적 관찰'에서 시작하여 표준화로 이행하였는데, 이제는 주객전도되어 언중을 선도하려고 든다. 사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국립국어원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오히려 한국어 화자로서 자기자신이 가진 내재된 문법을 신뢰하지 않고 권위있는 누군가가 결정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국어원에 지나치게 큰 권위를 부여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어휘의 뜻과 용례를 모아놓은 사전이지 사회규범을 제시하는 경전이 아닙니다. https://t.co/JMiwtyZgmx
— 김벤젠 金苯 ⌬ (@Benzenekim) August 9, 2021
한때 출판사와 신문사에서 사내 외래어표기법과 인물표기법을 정해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사내 규범은 그 출판사/신문사에서 출간하는 출간물에만 한정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의 규범은 빅브라더와 같이 '모든 한국어 사용 맥락'에서 작동한다. 국어원이 강제한 적도 없는데 스스로 자신들의 언어에 족쇄를 물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언어경찰' 완장을 차고 움직인다. 그러나 권위가 미치는 범위가 정해지지 않는 권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나는 딱히 극성 촘스키언은 아니지만 이 부분에서 촘스키는 분명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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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e, Jinsok. (2021). Loanword variation pattern of ayp, ephul, ayphullikheyisyen, and ephullikheyisyen: A follow-up quantitative sociolinguistic analysis. The Sociolinguistic Journal of Korea, 29(4), 123-155. [본문으로]
- Daland, Robert, Mira Oh, and Syejeong Kim. (2015). When in doubt, read the instructions: Orthographic effects in loanword adaptation. Lingua, 159, 70-9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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