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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대로

음성학 과제 냈다가 학부생에게 혼난 썰

sleepy_wug 2025. 1. 1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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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요약 

Praat을 이용해서 자신의 모음을 녹음하고 포먼트 분석을 시키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 과제에서 학생들은 폰이나 컴퓨터에 대고 had, hid, head, hood 등의 단어를 녹음하고 이를 녹음한 후에 모음부분을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과제를 하고 난 학부생들이 과제의 방향성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다른 학생들도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이 글은 습관적으로 내는 음성학 과제가 가질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고민해봅니다.

 

목차

     


     

    주의: 상당히 과장되어 있습니다

     

    1. 모음 포먼트 분석 과제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박사를 하고 나온 교수님들로부터 그 당시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희망에 가득찬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Microsoft Word에는 "자동요약"기능이 생겼는데 그걸 이용해서 학회에 낼 Abstract를 자동으로 써봤던 경험 (물론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문서요약이었음)이나, 노트북 마이크에 대고 자기 목소리를 녹음한 후 그걸 처음으로 praat을 이용해 분석했던 경험 등을 이야기하는데, 이분들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있다. 

     

    유명한 일화인데 현대적 음향음성학의 아버지인 Peter Ladefoged는 노트북으로 음성분석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자 '이제 난 armchair linguist를 초월한 bedside linguist가 될거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서 노트북으로 음성분석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각주:1]

     

    그래서 이분들이 처음 학부 음성음운론 수업을 맡으셨을 때, 앞다투어 praat으로 음성 녹음하고 분석하는 과제를 냈을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 진부한 과제가 되었지만 (통사론개론에 수형도 그리기가 있다면 음성음운론 개론에는 praat 써보기가 있다) 그 때는 그게 얼마나 참신했을까?

     

    그래서 지난 학기에도 여느때나 다름없이 이 과제가 나갔다. 아래는 과제 지시문을 거칠게 요약한 것.

     

    수업시간에 배운 praat 사용법을 실습해봅시다.
    praat에서 녹음버튼 누르고 had, hood, heed, had, ...., 단어를 녹음하세요.
    각 object를 열고 스펙트로그램이 잘 나왔나 확인하세요.
    모음 부분의 25% 50% 그리고 75% 구간에서 F1과 F2를 측정하세요.
    본인의 모음에서 측정한 F1과 F2 값에 대해 서술하세요. 이때 교과서 xxx쪽에 있는 미국 영어 모음의 포먼트값을 참고하세요.

     

    그리고 볼드처리 된 "교과서에 나온 '표준' 모음 포먼트 값을 참고"하라는 부분에서 많은 학생들이 질문과 불만과 혼란을 토로했다. 바로 규범주의 아니냐는 것이었다. 

     

    2. 언어학자들도 규범주의적이야

    이전에 쓴 글 중에 "언어학자 너희들도 규범적이야"라는 글이 있었다.

     

    언어학자 너희들도 규범적이야

    0. 요약학부생이 수업 중 던진 질문에 우리 teaching team 모두가 깊은 생각에 빠졌던 일을 공유합니다. 때는 개론 수업 중에 규범주의와 기술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언어학은 기술

    linguisting.tistory.com

     

    음성음운론 과제를 한 학생들의 불만/질문도 "표준모음을 정해놓고 그것과 학생 개인의 모음을 비교하도록 시키는 것은 '숨겨진 규범주의' 아니냐"는 논지인 것이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배경이 다양하고 많은 경우 영어 원어민이 아니다. 그런데 소위 '미국 영어의 표준'이라고 하나의 정해진 표를 주고 그것과 비교하라는 것은 잘못되었다. 라고 그 학생들은 주장했다.

     

    물론 학생들의 이야기는 백프로 타당하다. 어떤 모음의 포먼트값을 정해놓고 거기에 무조건 가까워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음성학이 하는 일은 영어발음교정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제에 아래와 같은 코멘트를 남기고 감점을 했다.

     

    "미국 영어에서 /i/모음은 F1이 300Hz, F2가 2300Hz 여야 해!!! 넌 F1이 730Hz, F2가 1100Hz 나왔으니까 옳지 않아!!"
    (느낌표는 학생들이 느꼈을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추가됨. 원래는 느낌표 같은 거 안 넣음. 원문은 다음 섹션에 나옴.)

     

    이런 코멘트를 읽었을 학생들은 "엥? 뭐지? 언어학은 규범주의에 반대한다던데 사실이 아니었나봄??" 할 수 있는 것이다. 

     

     

    3. 대부분은 오해입니다

    그런데 "포먼트값이 이러저러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틀렸다"는 코멘트는 "니 혀가 잘못됐어" 라는 뜻이 아니라 "니 측정이 잘못됐어" 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우리의 코멘트를 아주 오해한 것이다.

     

    대부분은 교수자들의 코멘트를 오해한 것이라 이말이야

     

    사실

     

    Your measurements of F1 730Hz and F2 1100Hz are incorrect. The F1 and F2 values of the American English /i/ vowel are supposed to be 300Hz and 2300Hz, respectively.

     

    와 같은 코멘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래와 같았다.

     

    아무리 특이한 방언을 사용한다고 하여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어느정도의 한정된 범위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음성학 과제의 내용을 이해하고 과제를 수행할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작동한다. 이러한 학생들의 /i/ 모음 발화는 소위 "표준"모음의 포먼트 값 F1 300Hz, F2 2300Hz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 측정했다고 보고한 F1 730Hz, F2 1100Hz가 정말이라면 그 모음은 오히려 /a/에 가까웠을 것이다. heed가 아닌 had를 발음했다는 것.

     

    흔히 캐나다 사투리 놀린다고 /aʊ/ 랑 /u/ 를 혼동한다고들 장난을 많이 친다. 그러나 캐나다인 누구도 How are you?를 Who are you? 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난 정말로 /i/를 발음했다고요!" 라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4. 더 좋은 과제의 방향: 일종의 bootstrapping

    4.1 표준 모음표 문제점 인정

    그러나 하나의 포먼트 표를 주고 마치 그것이 💖절대적 표준💖 인 것같은 연상을 시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사실 그 교과서에 나온 미국 영어 모음표는 학생들이 실제로 일상에서 대하는 현실 영어와도 동떨어져있었는데, cot-caught merger 등이 반영되지 않은, 뉴잉글랜드 (아마도 뉴욕??) 발음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더보기

     

    cot-caught merger라고 함은, cot과 caught의 발음이 합쳐져버리는 언어변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동부 영어에서는 cot와 caught 이 각각 [kɑt] [kɔt]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오직 모음만으로 이 두 단어가 구별된다. 이것은 바로 바로 바로 바로 "최소대립쌍"이다. 반면 많은 지역에서는 cot-caught 쌍이 동음이의어이다. 아래 지도에서 파란색 점이 cot caught merger 안 일어난, 즉 두 단어가 발음으로 구별되는 지역이고, 빨간색 점이 cot과 caught이 동음이의어인 지역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F1, F2로 인조 인간 모음을 만드는 방향을 제안한다.

     

    4.2 Praat의 VowelEditor 기능

    음운론적으로 유의미한 모음의 음향적 구성요소는 딱 세가지다. F1, F2 그리고 Pitch (fundamental frequency). 이 세가지만 있으면 비록 부자연스러워도 모음이 뚝딱뚝딱 만들어진다.

     

    따라서 학생들이 측정했다고 주장하는 F1, F2 값에다가 적당한 pitch 값을 넣고 인조 모음을 만들어서 들어보자는 것이다. (덧붙여서 모음표에 나오는 값을 넣고 인조 모음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다)

     

    인조 모음을 만들어서 들으면 "아 내가 진짜 발음한 소리랑 이렇게 다르게. 내가 측정 잘못했구나" 하는 자괴감(?)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니 똥 니가 먹어봐라 

     

    Praat에서는 New > Sound > Create sound from VowelEditor... 로 들어가면 이렇게 3가지 요소로 모음을 만들 수 있다.

     

     

    자, 학생이 본인의 /i/를 측정했는데 포먼트 값이 각각 F1 730Hz, F2 1100Hz 나왔다고 주장한다

     

    VowelEditor에 F1=730, F2=1100 되는 지점을 찍어보고 직접 들어본다면 이 측정이 제대로 된 건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들어보자! (이것이야말로 포먼트 측정한번 잘못했다고 네티즌들의 심판대에 오른 상황.ㅋㅋㅋㅋ)

     

    아래 영상에서는, 우선 학생이 측정한 포먼트 값인 F1=730, F2=1100 를 넣고 모음을 생성해서 들어본다. 이어서 소위 표준값인 300, 2300을 넣고 모음을 생성해서 들어본다. |< 표시로 나타내어진 곳이 전통적인 모음삼각도 상 해당 모음이 위치할 공간이다.

     

     

     

     

    판단은 이러한 측정을 한 각 학생들의 몫!ㅋㅋㅋ

     

    4.3 Bootstrapping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것 (이 경우엔 '표준모음표') 없이 기존에 이미 학생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이래저래 이용하는 걸 bootstrapping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위 사례에서는 "표준적인 모음은 이러한 포먼트 값을 가진다"라는, 어쩌면 규범주의적일지 모르는 지식을 배제하고 오직 학습자의 지식에만 의존해서 포먼트를 가르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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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tstrap은 부츠 등에 달린 작은 고리같은건데 신발신을 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저거 잡고 발 집어넣음. 아래 사진 보면 "아 저거!" 할 것이다.

     

    영어에는 "pull yourself up by your bootstraps"라는 표현이 있는데, 의미는 문자적으로는 'bootstrap잡고 스스로를 당기다'(?) 라는 무슨 말도 안되는 꼬리가 개를 흔드는 류의 뜻이겠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상황을 개선함"이다. (난 의미론자 아니라서 옥스포드 사전 인용함)

     

    언어학의 대부분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직관을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무위키의 "생성문법" 항목에서 "인간의 인지능력이 CPU라면, 언어능력은 별개의 GPU이고, 언어학은 GPU의 기능을 CPU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적었는데 (지금은 덮어쓰기된듯🥲), 컴퓨터 구조에 박식하다면 이 비유가 더 직관적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어학은 우리가 이미 알고있는 걸 설명하자는 거다. 따라서 뭐가 똥인지 뭐가 된장인지는 이미 학습자나 교수자나 다 알고있는 상태다. 그리고 인공 모음 생성하고 들어보기라는 과제는, 이렇게 이미 주어진 "똥과 된장의 지식"을 적극 활용해서 "포먼트"라는 지식을 추가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똥과 된장의 지식이라고 하면 교양없어 보이니까 "모음 소리에 대한 지식" 정도로 말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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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defoged는 세계 언어의 말소리를 수집하면서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쓴 적도 있었다. "요즘에야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 돌아다니며 채록하고 음향 분석까지 다 할 수 있지만, 나 때는 말이야(Latte is a horse) 45kg 정도 되는 기계를 짐꾼이랑 가지고 다니면서 채록했다 이말이야. 나그라 테이프 리코더, 배터리로 전원공급해서 쓰는 오실로스코프, 자외선 기록 장치, 그리고 구개도 작성(palatography)하거나 기압 공기량 측정하는 데 필요한 모든 부수 장비들 다 포함하면 무게가 그 정도 됐어. 한번은 니제르 삼각지 쪽으로 채록을 하러 보트 타고 들어가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군. 그 비싼 기계들이 들어가있는 가방은 말로는 방수가방이라지만, 비가 계속 쏟아지고 배 밑바닥에 물이 차오르고 있자니 야 이거 다 고장나면 보험처리는 되는거냐 걱정되더라고. 결국 도착해서는 추장으로부터 정체불명의 술 한잔 받아먹고서는 화자가 한 열명 정도 남은 사멸위기 언어인 Defaka어 화자들의 음성을 기록할 수 있었어. 며칠 뒤 비가 그치고 돌아오면서 석양을 보는데, 인생에 이런 기회가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냐 싶더라고." 참으로 낭만의 시절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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