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이 되고 채점을 하고 있으면 커리큘럼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하게 된다.
우리과는 커리큘럼 상 P-side 과목이 5개나 존재하고 (그것도 사회언어학, acquisition 등 periphery 말고 순수 이론과목만 고려해도), 그걸 음운론이랑 음성학이 2:3 내지는 2.5:2.5로 잘 갈라먹는 상황이다. 이렇게 과목이 많은데 1개 과목 혹은 0.5개 과목은 "데이터 읽는 방법"과 "일반화하고 그걸 글로 쓰는 방법"에만 할애하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이다.
모르겠다. 이론은 그냥 배우고 적용하고 하는 것이라 technic인데, 언어데이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는 사실 art인 것같다. 둘다 기술이다. 후자의 art 기술은 수업에서 흔히 '전제되는' 듯하고 다루지 않는데 조금 문제인 것같다. 왜냐하면 음운론에서는 후자의 기술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싶어서다. 1
이론과 설명은 데이터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반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반화가 흔들리면 그 위엔 어떠한 이론도 설명도 세울 수 없다. 이론은 몰라도 배우기 쉽고 바뀔 수 있지만, 데이터는 잘못 보거나 볼줄 모르면 그 무엇도 시작 못한다.
아주 비근한 예:
어떤 패턴이 "허용된다"는 건, 데이터셋에서 패턴요건을 충족하지 않는 데이터와 충족하는 데이터가 양립한다는 것이고,
어떤 패턴이 "강제된다"는 건, 모든 데이터가 그 패턴을 충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패턴이 허용된다"라고 주장하려면, 데이터에서 그게 충족된 사례와, 충족되지 않은 사례를 명시적으로 보여주어 근거로 삼아야 하고,
"어떤 패턴이 강제된다"라고 주장하려면, 데이터에서 그게 충족된 사례만이 있다는 걸 명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교수자한테는 너무 당연한 것이라 가르칠 생각도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나 모든 학생들한테 이런 게 당연한 것 같지는 않다.
이번학기 고득점을 이어가는 학생들을 보면 처음부터 명확히 뭘 봐야할지 알고 명시적으로 일반화를 문장으로 서술하고 그 일반화의 증거를 주어진 데이터에서 골라낼 수 있다. 사용될 자질군, 규칙 제안하기, 규칙순, 도출을 통한 증명, 그리고 처음본 데이터 예측 등등은 이렇게 일반화가 된 상황에서야 할수있다.
반면 아예 데이터를 볼줄 모르는 / 보려 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다. 예술대학이나 문학, 국제정치학, 철학 등에서 온 학생들에게서 흔한 것같은데, 데이터 안 보고 자기가 이미 아는 지식에만 의존하려고 한다. 예를들어, "이 언어 데이터 상에서 원순모음이 항상 양순음에 후행하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 데이터 각각을 붙잡고 양순음+비원순모음 사례인지를 끈질기게 찾을 줄을 모른다. 단순히 머리속에 "양순음, 원순모음, .... [양순성] 자질 공유, .... 자질공유하는건 공기한다는 지식... 그러니까 양순음과 원순모음도 항상 동시출현하겠네" 이런 '지식'만 가지고 jump the gun하고 데이터는 안 읽는 것이다.
데이터를 보더라도 사고의 과정을 명시적으로 적지 않는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적지않은 전제에 대해 내가 코멘트했더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왜 적어야 해요?" 라고 반문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때마다 눈 똑바로 바라보고 "implicit assumption"이라고 얘기해주기는 하는데, 이런 사고의 습관은 참 고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아예 반학기 정도는 아예 데이터만 잡고 빈칸채우기 식으로
패턴:___________
충족하는 datapoints: ___________
충족하지 않는 datapoints: ________
이 패턴은 허용되는가? (예 / 아니오)
이 패턴은 강제되는가? (예 / 아니오)
이 패턴은 금지되는가? (예 / 아니오)
왜 그런가? ______________
이렇게 데이터에 데이터에 데이터를 본 다음 (물론 갈수록 빈칸채우기에서 문단쓰기로 이행해야겠지만) 중간고사까지 "데이터 읽기"만으로 보는 게 좋을 것같다.
물론 커리큘럼에 P-side과목이 넘쳐나는 경우에 한해서.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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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의 '기술'은, "생각의 기술", "판단의 기술", "깨달음의 기술" 등에서는 art에 상응하는 개념이 될수도 있는 넓은 개념인 듯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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