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정지 신호가 저기 있네"를 어떻게 영작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There is a stop sign." 과 "The sign over there says to stop."
두 가지 영작을 제시하고 There is.. 를 쓴 전자는 어색하고 그건 영어식 사고 아시아식 사고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됩니다.
이 글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해당 두 문장 모두 완벽히 자연스럽지만, 화용적으로 다르게 쓰이는 듯 하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갑자기 분위기 언어학"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래 영상을 기초로 "갑자기 분위기 언어학"하는 글이니까요. 🤣
영상은 채널A에서 2024년 1월 28일에 방영된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 13회의 일부입니다.
The item included is used under the principles of "fair use" as outlined in Section 107 of the Copyright Act of 1976. It is provided solely for educational purposes to facilitate learning, research, and the advancement of knowledge. 여기 포함된 자료는 미국 1976년 저작권법 제107조에 명시된 "공정 이용" 원칙에 따라 사용됩니다. 학습, 연구 및 지식 증진을 촉진하기 위해 오직 교육 목적으로 제공됩니다.
목차
1. 구정보와 신정보
인간은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이때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의사소통 맥락을 염두에 두고 관찰하는 언어학의 분과를 화용론이라고 한다.
화용론의 주제 중 하나는 정보구조(information structure)를 어떻게 언어로 인코딩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정보구조는 구정보와 신정보를 어떻게 말로 구성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보구조에 따라 대화맥락 상 이미 알고있는 정보(오래된 정보라 하여 구정보라고 하기도 하고 주어진 정보라 하여 given information 이라고도 함)와 새로 전달하는 정보(새로운 정보라 하여 신정보라고 흔히 말한다)를 구성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민준이는 알바를 그만두었다"라는 동일한 사건을 정보구조를 다르게 하여 표현해보자.
a. "내가 저번에 말했던 그 알바생 민준이, 결국 그만뒀대"
b. "내가 저번에 누가 알바 그만뒀다고 했잖아, 그거 민준이였어"
a. 는 "민준"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대화참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만뒀다"는 게 새로운 정보다. 반면 b.는 누가 "그만뒀다"는 것이 공유되고 있는 정보인 구정보이고 그 인물이 "민준이였다"는 게 새로운 정보다.
인간이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말을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정보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언어에서 정보구조에 따라 문장을 다르게 구성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언어사용의 척도이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언어사용을 강조하는 이유는, 정보구조에 따라 다른 통사를 활용하는지 여부는 언어간 편차가 크고 같은 언어라도 방언 간 편차가 크며, 심지어 개인간에도 편차가 너무 크다. (언어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competance vs. performance 구도에서 정보구조에 따른 통사사용은 대체로 performance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러나 모든 언어가 이렇게 정보구조에 민감한 건 아니다. 심지어 똑같이 고립어로 분류되는 중국어와 영어를 비교해보았을 때 중국어의 경우 정보구조에 매우 민감한 통사를 보이는 반면 영어는 덜 그렇다.
c. 來了 兩個人
왔다 두사람
d. 兩個人 來了
두사람 왔다
e. Two people came to the store.
두 사람이 가게로 왔다
f. To the store came two people.
가게로 왔다 두사람이
중국어에서 c와 d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언어유창성의 측면에서 비교적 중요하고 아마도 출현빈도도 비슷할 것이다. 반면 영어 코퍼스에서는 e와 같은 구조가 월등히 높은 빈도를 보일 것이고, f는 다소 예스럽다거나 시적인 느낌이다. 물론 모두 문법적인 문장이다.
이런 차이를 두고 언어학자들은 이렇게 일반화한다. 중국어는 Topic-comment structure에 더 가깝고, 영어는 Subject-predicate structure에 더 가깝다. 아마도 이 영상에서 "아시아적 사고"와 "영어적 사고"를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뭉개놓고 '아시아'라고들 하는 한국 일본 중국의 언어가 topic-comment structure를 활용하는 반면 영어에서는 subject-predicate structure를 활용한다는 것을 비교한 것이다.
2. There문의 경우
영어의 there-construction(there문)은 좀 독특하다. There문에 나오는 문장주어의 성격을 통사론에서 많이 연구했고, 정보구조의 측면에서도 there문에 나오는 논항들의 성격은 흥미롭다.
무엇보다 there문에 일대일로 상응하는 한국어 문형은 없는 듯하다. "-가 있다"는 주어가 신정보일 때는 there문에 상응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어색하다. 예컨대, 밑도끝도없이 "호랑이가 있다."라고 한다면 There is a tiger 겠지만, "호랑이는 고양잇과의 동물이다. 호랑이가 있다." 처럼 호랑이를 구정보로 만들어버리면 ?There is a tiger. 는 어색하다.
각설하고, 영어의 There문에서는 There에 후행하는 논항이 신정보이다. 연구자에 따라 There를 불어의 Voila 처럼 의미를 가지지 않는 expletive (의미기여 없이 들어가는 표현) 로 보기도 하고, There 자체를 구정보로 취급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There문의 가짜주어인 there는 "over there", "here and there" 등에서 "저기"라는 의미가 분명한 there 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단순히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있어서 There is...를 쓰는 게 아니라, 영어에선 주어자리가 빌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거나(expletive라는 주장들), 이때의 there는 뒤에 나오는 논항(의미상의 주어)과 특정 자질을 나눠 가지는 특별한 종류의 논항인 것이다.
There is a book on the table. 에서 a book은 반드시 신정보이고, 만약에 맥락상 책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던 와중이라면 쓸 수 없다. 영어에서 명사가 구정보일 경우 정관사 the를 가져야 하므로 굳이 문장을 만든다면 *There is the book... 이 될텐데, 단박에 비문법적이다.
3. 표지판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중이었나?
자 이제 다시 두 가지 영작 제시하는 영상으로 돌아가보자. 맥락 중에 표지판이 있었는지를 주목해보자.
The item included is used under the principles of "fair use" as outlined in Section 107 of the Copyright Act of 1976. It is provided solely for educational purposes to facilitate learning, research, and the advancement of knowledge. 여기 포함된 자료는 미국 1976년 저작권법 제107조에 명시된 "공정 이용" 원칙에 따라 사용됩니다. 학습, 연구 및 지식 증진을 촉진하기 위해 오직 교육 목적으로 제공됩니다.
조정식: "정지 신호가 저기 있네" (멀리멀리 손가락으로 가리킴) 민서에게 한번 시켜봅시다
민서: There..
조정식: 구러취! There is 가 나오지 그치.
민서: There is.... a stop signal...?
조정식: 아시아 계통의 학생들한테 요거를 시켜보면 거의 백이면 백프로 이렇게 다 나옵니다. 틀린 영작은 아니에요. 근데 이제 아시아인들이 왜 이렇게 영작을 하냐면 저희는 관계가 중요한 문화 속에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있는 공간은 여기, 정지 신호가 있는 공간은 저기인 거에요. 그래서 저기라는 것이 되게 중요한 거라서 there이 앞으로 나와야 문장이 자연스러운 거죠.
조정식: 근데 이게 영어권 국가에서 생활해보신 어머님은 아시겠지만, 이게 틀린 영어는 아니지만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화법은 아니에요. 오히려 이 문장을 더 영어스럽게 써보려면,
조정식: The sign over there says to stop.
학생(민서)이 만든 문장과 강사(조정식)가 만든 문장은 엄밀히 전제하고 있는 맥락이 다르다. 두 문장이 사용될만한 대화맥락(context 앞서 무슨 말을 했나 안했나)이나 사용맥락(register 글로 쓰는 맥락이냐 말을 하는 맥락이냐, 공식적이냐 사적이냐 등등)이 모두 다르다.
방송에서 편집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표지판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런 주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무엇도 신정보가 될 수 있다. 또한, 대화상 주어진 과업이라는 점에서 입말을 register로 보는 게 타당하다. "종이에 써보세요" 이런 게 아니라 "말해보세요" 였다. 1
다시한번 말하지만 방송에서 어떻게 편집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주어진 데이터만으로 보면
- 정지신호는 신정보
- 입말
이 두가지는 확실한 듯하다.
4. 아이의 대답은 훌륭하다
정지신호가 신정보이고, 문어체가 아닌 입말로 이 정보를 전한다는 맥락이라면 학생이 입밖으로 내뱉은 There is a stop sign.은 너무 훌륭하다. 아니, 말마따나 shotgun(운전석 옆자리)에서 내뱉기로는 Look! A stop sign! (야! 정지신호!)이 가장 자연스럽지 않나?
게다가 앞서 there문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서 언급했듯이, 이때의 there는 '저기'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지 않고, 무엇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점은 학생이 'a stop sign'이라고 부정관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정지신호가 맥락 상 새로 전달해야 하는 정보고 이에 따라서 해당 논항명사에는 부정관사를 잘 붙였고, 심지어 "아시아식 사고방식"에 빠져서 "저기"를 드러내기 위해 "A stop sign is there (여기말고) 저기에 정지신호가 있다" 라고 쓰지도 않았다. 따라서 안 어색하고 훌륭하다.
다만 조정식 강사의 문장 "The sign over there says to stop."도 너무 훌륭하다. 정지신호인지 정지신호인지 좌회전표시인지 불확실한데 할튼 there's a sign. 이런 맥락에서 그 sign (구정보)이 구체적으로 뭐였는지 (신정보) 를 제공하는 표현으로 자연스럽다. 즉, 영어식 사고 아시아식 사고 잘 전환했기 때문은 아니다. 게다가 더 훌륭한 점은, say/tell 등의 어휘의미 측면에서 영어의 독특한 면을 살렸기 때문이다.
흔히 단어암기할 때 영어단어-한국어 뜻 짝맞추어 제시하는 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나의 영어단어가 반드시 한국어 단어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생각하기로는 say tell describe hate 등이 딱히 한국어의 대응쌍 말하다 말하다 기술하다 증오하다와 정확히 대응되지 않는다. say는 주지하다시피 proposition을 tell은 정보를 받는 쪽을 포커스로 두고, describe와 hate 역시 한국어의 ✨기술하다✨ 나 😈증오하다😈 만큼의 무게를 지니진 않는다. 엄청 싫으면 hate고 사실그대로 쓰면 describe다.
아, 물론 엄밀정의된 학명이나 개념어 등은 일대일 대응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심지어 phoneme 처럼 전문어도 한국어로 일대일 대응이 안 되는걸?ㅋㅋㅋㅋ [더 알아보기]
휘뚜루마뚜루 두 문장이 사용될법한 맥락을 조성해보자면...
[맥락: 조수석에 앉은 민정이와 운전석에 앉은 지영이가 대화를 하고 있음. 민정이가 정지신호를 발견하여 알려주고자 함.]
민정: There's a stop sign! (구정보: 없음 / 신정보: '정지 표지판'의 존재)
[맥락: 조수석에 앉은 민정이와 운전석에 앉은 지영이가 대화를 하고 있음. 두사람이 저 멀리 길가에 뭔가 길쭉하게 세워져 있는 것을 봄. 안개가 껴서 정확히 뭔진 안보이지만 표지판(sign)인 것은 확실함.]
민정: Can you see the sign over there?
지영: I think so...?
[맥락: 속력이 빨라서 그냥 표지판을 지나쳐버림]
민정: That sign said to stop! (구정보: '표지판'의 존재 / 신정보: '표지판의 내용=정지')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조금만 환기시켜보자. 오래전에 한국에서 유행했던 꽈찌쭈 밈이 있다. "페이퍼 타월이 여기 있네"를 영작한다면 어떻게 할까? 뭐 "정지 신호가 저기 있네"나 "페이퍼 타월이 여기 있네"나 비슷하잖아.
백회장 똘마니: You could hand me a paper towel there, bud?
꽈찌쭈: 😲
백똘: Paper towel. This one's broken.
꽈찌쭈: uh........
백똘: Oh. You don't speak English. Sorry!
백똘: 아 페-퍼 타올이 여기이네! (Here's a paper towel)
적어도 Lost의 제작진은 "페이퍼타월이 여기있네"의 뜻이 "Here's a paper towel!" 이라고 했고, 나 역시 동의한다. 심지어 대화맥락 상 페이퍼 타월은 구정보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아마 대사가 영어였으면 Here's에 prosodic stress를 주는 방식으로 정보구조를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에서 조사를 달리 쓰거나 어순을 바꾸어서 topic-comment 구조를 분명히 하는 것과 대조하여 영어에서는 그러한 요인으로 문형을 굳이 바꾸지 않아도 나쁘지 않다. 아시아적 사고 영어적 사고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자. 어떤게 topic이고 어떤 게 comment 라는 걸 따져서, 그 논리를 외국어에까지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시아적 사고일지도 모른다.
하나 더.
얼마전 유행했던 밈인데, 독일 아기가 아빠한테 빨간불에 똑바로 정지하라고(?!!) 고나리 하는 영상이 있었다.
아기는 Das ist Rot (단어 대 단어로 직역하자면 That is red) 라고 하는데, 영어 자막은 그냥 It's red다. It says red도 아니고 그냥 It's red. 입말의 맥락에서는 뭐가 더 자연스러운지 분명해진 듯하다.
5. 결론: 어쩌면 이걸 신경쓰는 것 자체가 아시아적 사고
정리하자면, 표지판이 구정보이냐 신정보이냐에 따라, 그리고 입말이냐 문어체냐 등의 상황에 따라 두 문형을 선택할 수 있다. 둘다 자연스럽다. 어떤게 아시아적 사고고 어떤게 영어적 사고 이런 게 아니라, 맥락에 따라 둘 다 옳다.
The sign over there says to stop. 는 표지판이 이미 주어진 정보일 때 자연스럽고 표지판에 대해 이야기하던 맥락이 아니었으면 어색하다. 문어체에서는 좋지만 입말에서 쓰기엔 부담스럽다. 한국어로도 "저 빨간 표시는 멈추라는 뜻이야"라고 한다면 상대는 속으로 '얘 왜이럼🤔?' 할것이다.
반면 There is a stop sign은 표지판이 신정보이고 입말일 때 자연스럽다. There는 굳이 "저기"를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통사적 주어자리를 채우기 위해 자리차지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강사가 말한 "아시아적 사고와 영어적 사고의 차이"라는 말도 맞다. 그러나 강사 말처럼 "There is.."가 아시아적, "It says.."가 영어적인 게 아니다. 이런 '영작 논쟁'와 표현에 대한 우열 평가가 아시아적이다.
많은 동아시아인들은 영어를 각잡고 하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가상속의 완벽한 존재 ✨원어민✨ 이 존재하고, 원씨 가문의 32대손인 어민씨가 구사한다고 전설속에 전해지는 그 영어를 똑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영어표현을 문자적으로 자신의 모국어로 해석했을 때 어색하다면 "오 이건 귀하군요!" 하면서 그걸 ✨영어적인✨으로 숭상한다. 난 이런 것이 아시아적 사고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누가 나 운전하는데 옆자리에서 "The sign over there says to stop." 한다면, 아시아적 사고의 발로라고 생각할 것이다.ㅋㅋㅋㅋ
- 글이 유익했다면 후원해주세요 (최소100원). 투네이션 || BuyMeACoffee (해외카드필요)
- 아래 댓글창이 열려있습니다. 로그인 없이도 댓글 다실 수 있습니다.
- 글과 관련된 것, 혹은 글을 읽고 궁금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댓글을 달아주세요.
- 반박이나 오류 수정을 특히 환영합니다.
- 로그인 없이 비밀글을 다시면, 거기에 답변이 달려도 보실 수 없습니다. 답변을 받기 원하시는 이메일 주소 등을 비밀글로 남겨주시면 이메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 조정식 강사가 signal 아니라 sign이라 했으니 '신호'는 신호등 빨간불 파란불 이런게 아니라 표지판을 의미한 것으로 생각했다 [본문으로]
'갑자기 분위기 언어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짧은 햇님의 중의성 (0) | 2024.11.18 |
---|---|
한국어 단모음체계와 개념에 잡아먹힌 좀비 (2) | 2024.10.28 |
양의 격률 위반 사례 노주현의 차기작 (0) | 2024.08.26 |
지식인의 음운론 질문에 정성들여 답하기 (0) | 2024.08.16 |
친족명사 의미 내부 구조 있나? (9) | 2024.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