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통사론, 의미론으로 수업을 하거나 논문을 쓸 때는 예시문장(예문)을 사용합니다. 예시문장에는 한국어의 "홍길동" 같은 '아무개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저에게는 골치아팠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저의 고민을 다룹니다. 또한 영어/한국어 예문에서 사용하면 좋겠다 생각하는 무작위 이름 몇 가지도 공유합니다.
1. 왜 예시문장?
저는 음운론 전공이지만, 예시문장(예문)을 만들어야 할 경우들이 간혹 있습니다. 학부 개론수업에서 강의를 해야할 때에는 영어 예문을 만들어서 설명을 도모하고, 통사론 논문을 써야할 때가 간혹 한국어 구문을 설명하기 위해 예문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통사-의미론 전공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예문을 만드는 것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제가 창의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고, 통사론 의미론 전공자들도 자꾸 예문을 들다보면 뚝딱뚝딱 예문을 잘 만드는 훈련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1
그냥 예문같은 건 아무 문장이나 들어도 되지 않느냐할 수도 있지만, 나름 복잡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특히, 문장이 지시하는 상황이 윤리적이지 않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문장을 예문으로 쓸 수는 없는 일입니다.
(1) John beats his wife.
너무 극단적인 예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래의 문장은 어떤가요? 80-90년대 까지 통사론 수업 예문에서 가장 잘 쓰였던 문장이라고 합니다.
(2a) John kicked the dog.
(2b) John kissed Mary.
그러나 2023년 현재에는 사용하기 불편한 문장입니다. 언어와 문장 자체에는 어떠한 윤리와 가치판단이 없더라도, 그것이 발화되는 사회적 맥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2)와 같은 문장은 오늘날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2. 윤리적 / 정치적 올바름 문제
문제가 되는 예문들을 문제가 안 되게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문을 만들 때 윤리적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문장에 사용되는 사람이름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사람이름을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첫 번째로, 문장에 사용된 사람이름이 암시하는 성별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투 이후로, 남자가 여성에게 kiss한다는 상황을 나타내는 문장이나 기타 남녀가 같이 등장하는 문장의 사용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성별에 중립적인 Alex와 같은 이름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고, 성별을 하나로 (주로 여성으로) 통일하여 예문을 만듭니다. 또한 love/kiss/like 등은 목적어로 동물이나 사물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로, kick 등의 술어를 사용하는 문장도 주어나 목적어에 사람이름이 사용될 경우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주어가 되어 Mary kicked the dog이라면 동물학대의 뉘앙스가 되고, The dog kicked Mary. 도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단순히 편의를 위해서 자국어 이름이 아닌 외국어 이름을 예문에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언어학 내부에서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일인데, 서유럽 언어가 아닌데 유럽식 이름을 예문에서 사용하는 통상적인 관행이 과연 옳은 것이냐는 겁니다. 예컨대 한국어 통사론을 논하는 논문인데, "John이 키가 크다" 와 같이 외국인 이름이 주어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래도 근현대 (인류)언어학의 성립과정에서 숨길 수 없는 제국주의적 흔적에 대한 반성입니다.
결국 이름붙이기로 귀결됩니다!
이를 정리해서, 저의 경우는 예문을 만들 때 아래의 사항들을 고려합니다.
- 무조건 여성이름을 사용할 것.
- 폭력적 행동을 지시하거나 감정을 나타내는 동사를 자제하고, 만약 반드시 써야할 때에는 반드시 목적어를 물건으로.
- 서술 대상 언어에서 통용되는 이름을 사용할 것. 예를들어 한국어 논문에서는 '지영', '수현', '지아' 등의 이름을 사용하고 Tiffany, Rechel, Alex를 쓰지 않는다.
3. 친근함의 문제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예문에 나오는 사람이름이 친근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특히 수업할 때 그러합니다. 물론 저도 옛날에는 맨날 영어 문장에선 John, Jane, 혹은 Tom 만 썼고, 한국어 문장에선 '철수' '영희' 혹은 '민수' 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은 저 자신한테도 너무 지루한데, 제가 지루할 정도면 학생들은 얼마나 재미없을까요.
그래서 저는 80년대생이기 때문에 제 주변에 많은 80년대생 여성 이름들을 예문에 사용합니다. 학생들은 90년대 후반 생 혹은 2000년대생이기 때문에, 이 이름들은 실제 교실에 있는 학생들 이름이랑 겹치지도 않아서 좋습니다.
제 경우는 그냥 '갑', '을', '병' 하듯이 자동적으로 Tiffany, Rachel, Alex가 나오고 조금 생각을 하면서 예문을 쓰면 Jennifer, Jessica, Sarah 도 쓰는 것 같습니다. 즉, 확실히 어떠한 여성을 지칭하거나 중성적인 사람이름만 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매우 주관적인 느낌이겠지만, Tiffany pushed Rachel off... 같은 문장을 써도, 그것은 Tom pushed Rachel off.... 라든지, Tiffany pushed Tom off.... 같은 문장보다는 덜 폭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문장의미를 넘어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은 언어학의 영역이 아니고 문화나 철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저는 단지 '느낌'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push 같은 동사의 목적어로 사람을 쓸 일도 없고요.
그리고 아래 사이트는 미국 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이 제공하는 80년대생 이름 통계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트에 들어가면 1980년대 말고도 다른 시기의 흔한 영어이름도 검색할 수 있습니다.
https://www.ssa.gov/oact/babynames/decades/names1980s.html
4. 응용문제: 한국어를 영어로 전사해야 할 경우
언어학 개론에서 꼭 다루는 개념으로 '메타언어'와 '대상언어'가 있습니다. 언어학 연구 성과는 '언어'를 통해 전파된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이때 분석이나 기술(describe)의 대상이 되는 언어를 '대상언어'라고 하고, 이 대상언어를 연구한 성과를 전파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메타언어'라고 합니다. 예컨대, 한국어에 대해서 연구한 다음에 그 성과를 영어로 발표하거나 논문으로 쓴다면, 대상언어가 한국어, 메타언어가 영어가 됩니다.
메타언어와 대상언어는 일치할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메타언어와 대상언어는 다릅니다. 이러할 경우, 대상언어의 예문을 메타언어로 전사 및 gloss해서 제시해줍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로 논문을 쓸 때는 한국어 예문을 영어로 전사 및 gloss해서 제시합니다. Leipzig Glossing Convention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2[링크] 를 참고해주세요.
한국어를 영어로 전사할 때, 언어학에서는 표준적으로 Yale Romanization 방식을 사용합니다. Yale 방식은 한국 정부서 제정한 로마자표기법보다 오래되었고, 언어학계는 물론 북미의 도서관 사서들 사이에서도 널리 쓰입니다.
그런데, 앞서 "서술 대상 언어에서 통용되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라는 원칙을 제시했었습니다. 한국어에 대한 논문 쓰면서 "John은 Mary가 왔다고 말했다" 같은 것 좀 하지 말고 "민철은 지수가 왔다고 말했다"라고 쓰자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어로 짧은 이름이라도 Yale 방식 (그리고 다른 로마자표기법도) 으로 변환하면 무진장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지식인 인증 "능력자"[링크] 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있는 Hangul to IPA converter를 통해 몇 가지 한국어 이름들을 Yale식으로 변환해봅시다.
(한글 변환기의 링크는 여기 있습니다.)
이름 | Yale표기법 |
철수 | Chelswu |
영희 | Yenghuy |
병철 | Pyengchel |
준혁 | Cwunhyek |
병철, 준혁의 경우는 로마자로 변환하면 무척 길어지고, 예문에서 사람이름 자체가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됩니다. 한글로 예문을 제시했을 때에는 해당 이름들이 매우 콤팩트하게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영어로 glossing 된 결과는 참 보기 싫습니다.
따라서 "어떤 (여성) 이름이 영어로 전사했을 때도 간명한가?"의 문제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논문 쓰기 싫어서 그런거 맞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그 결과입니다. 이것은
- "철수", "영희", "민수"처럼 진부하지 않으면서,
- 실제로 현대 대한민국에 있는 이름이면서,
- 영어로 표현해도 4글자인
한국어 이름들의 목록입니다! 🥁🥁🥁
이름 | Yale표기법 |
지아 | Cia 3 |
서아 | Sea 4 |
다은 | Taun |
지은 | Ciun |
나은 | Naun |
시은 | Siun |
지유 | Ciyu |
주아 | Cwua |
지우 | Ciwu |
5. 관련된 논문
이 글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언어학 예문에 나타나는 편향에 대한 논문 두 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논문들은 여태껏 언어학 저널에 수록된 통사론 의미론 논문들에서 여러가지 편견이 발견된다고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들어 "남성주어 = 적극적 역할 / 여성주어 = 수동적 역할" 의 연관성이나, 애초에 문장 예문에 여성이 별로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지적합니다.
Kotek, H., Dockum, R., Babinski, S., & Geissler, C. (2021). Gender bias and stereotypes in linguistic example sentences. Language 97(4), 653-677. [링크]
Macaulay, M., & Brice, C. (1997). Don’t Touch My Projectile: Gender Bias and Stereotyping in Syntactic Examples. Language, 73(4), 798–825.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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