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공부를 넘어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선을 넘는' 게 직무(job description)에 포함되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선을 너무 넘어버리면 괴물이 되어버린다. 내가 만든 한글→IPA 웹앱이 그러하다. 만약 연구자가 '전문적으로' 선을 넘는 사람들이라면, 연구는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인걸까?
1.
'선을 넘다'라는 표현이 있다. '선'은 기대되는 정도, 혹은 예상되는 정도를 말한다. 사람 사이에서 '선을 넘는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흔히 예의나 규칙 상 예상되는 정도를 넘어서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거나 혹은 호의를 베풀거나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선을 넘는 경우가 있다. 어떠한 프로젝트에 너무 몰입해버리면 그것이 원래 의도하던 바나 목적하던 바를 넘어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만약 원래의 목적, 원래의 의도가 선이라면 이것은 선을 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넘기는 결국 본래의 모습을 잃은 괴물을 만들어낸다.
2.
원래 웹앱 "한글 → [hɑŋɡɯl]"(링크)은 말 그대로 한글 표기를 IPA나 Yale Romanization으로 변환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어를 전사하는 작업은 논문을 쓸 때 상당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루하고 실수가 잦다. 기계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기계가 잘 한다. 그래서 컴퓨터 시켜서 빠르고 정확하게 해버리자, 뭐 이런 것이다.
한글을 받아서 IPA를 출력하는 오토마타 가 바로 '선'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군더더기를 더하기 시작했다. 필수규칙과 수의규칙을 적용하기, 어떤 규칙을 적용할 지 선택할 수 있게 만들기 등등..
그리고 그것의 최종체는 한자(漢字)까지 한국식으로 읽어버리는 괴물.
위의 이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이 프로그램에 집어넣은 것이다. (너는 음운론이 좋니? 는 무시해달라) 훈민정음 해례본은 아래 텍스트 파일로 업로드하였다.
내가 이걸 쓸 일이 있을까? 어짜피 우리 (학문)세대는 물론 우리의 윗세대도 논문에 한국어 문장 인용하면서 한자를 쓸 일이 없다. 적어도 그런 논문을 읽은 적이 없다. Kim-Renaud (1974)에서 이미 한자는 '학습'의 대상으로 명시되지 않았는가? 즉, 한자는 한국어 문법 그자체와는 독립된 지식이기에 한국어 전사에서 굳이 한자를 쓸 일이 없다. 따라서 내가 논문을 쓰면서 한자들어간 문장을 IPA나 Yale로 전사할 일은 없을 것이다. 1
결국 이 웹앱은 처음의 목적을 넘어선 괴물이 되어버렸다. 쓰(이)지도 않을 기능을 추가한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의 유희(?)를 위해서였다. '과연 합리적인가?'를 생각해보면 답변은 '아니다'지만, 어쩌면 연구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괴물을 만들고 또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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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Renaud, Y. (1974). Korean Consonantal Phonology (Order No. 7517124). Available from ProQuest Dissertations & Theses Global. (302695153). Retrieved from https://www.proquest.com/dissertations-theses/korean-consonantal-phonology/docview/302695153/se-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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