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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으로 박사유학/언어학 박사 생활하기

학부 개론 수업 중간고사 후일담

sleepy_wug 2023. 10. 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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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한 번은 학부 개론 수업 조교를 하면서 중간고사 출제와 채점의 후일담을 메모했었습니다. 언어학에서는 어떤 답안지를 채점자가 선호하나, 언어학(혹은 음운론)개론은 왜 문제출제가 어렵나 등등을 두서없이 썼습니다. 그 당시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나 맥락이 희미해졌을 테니 그것을 다시 정리해서 여기에 올려봅니다.
 

목차

     

     

    1. 개론 수업 TA의 업무

    언어학개론의 한 학기 수강생은 200 - 300명이다. 한 강의실에 다 들어가는 건 아니고, 대체로 두 타임으로 나누어서 수업이 진행된다. 또한 2 - 30명 단위로 소그룹이 구성된다. 한 명의 Teaching Assistant (TA)는 두 개 내지 세 개의 소그룹을 전담하여 학생을 대면한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인원이 엄청나다 보니, 교수는 커리큘럼과 평가도구 수립 등 큰 그림을 그리고 강의를 할 뿐, 실제로 학생과 마주하는 건 TA의 몫이다. 교과내용 커버하는 것 외에도 학생 상담도 한다. 하는 일들 몇 가지를 생각나는대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 고민 상담: 학생들이 대면이나 이메일로 교과내용이 아니라 전반적인 학습 고민이나 심지어 인생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수님은 무서운지 학생들이 TA들에게 마음을 얘기하곤 한다. 그럴 때 상담해준다.
    • office hour 진행: Office hour는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방문 열어놓고 학생들 교과 상담 해주는 시간인데, 학생들은 예약 없이 walk-in 으로 😂😂 들어와서 질문을 한다. 주로 중간/기말고사 후에 "이거 점수 왜이래요?" 하고 호소하려고 줄을 서고, 평소때는 한 두명 정도 와서 데이터분석이나 개념해설을 물어본다.
    • 조별과제 점검: 많은 경우 언어학개론에서는 조별 프로젝트 하나를 학기동안 진행하고, 학기말에 15쪽 짜리 paper로 제출하거나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등으로 발표한다. 이를 위해 각 조별 프로젝트 진행상황 점검하고 도와주는 것도 TA들의 몫이다. 간혹가다 조 내부에 갈등이 생길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중재하는 것도 TA의 할일이다. 
    • 문제 출제와 채점: 가장 스트레스 받는 부분이다. TA들은 석사/박사 과정생들 중에서 교육 커리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시험문제를 내거나 답안지 채점하는 것도 배움의 과정이라, TA의 업무분장에는 문제 출제와 시험지/과제 채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은 바로 이 '문제 출제와 채점'에서의 후일담을 다루기 때문에 전체를 볼드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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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언어학개론 중간고사 채점 마치고 나서 들었던 잡다한 소감을 소개한다.
     

    2. 답안지는 양보다 질

    다른 학과에서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언어학, 특히 음운론 학부 수업에서는 분석 및 풀이 과정을 간단명료하게 적을수록 좋다. 장황하면 할수록 감점당할 건덕지가 많다고 해야 할까?

     

    음운론개론 중간고사의 소위 essay question (데이터 주고 음운론적 분석phonological analysis 하라고 요구하는 문제)은 딱 세 문장이면 족하다. 이 섹션에서는 두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2.1 예시1: "두 소리는 음소인가?"

    이런 문제는 IPA로 표기된 두 소리를 주어주고, 이 두 소리가 나타나는 언어 데이터를 통해 두 소리가 해당 언어에서 음소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문제다.

     

    이런 문제는 딱 아래와 같은 세 문장을 정확하게 쓰면 만점이다.

     

    1. 데이터 상 두 소리의 분포를 기술하기
    2. Complementary distribution인지 아니면 overlapping distribution인지. 혹은 최소대립쌍(minimal pair)이 있는지 
    3. 그래서 음소인지 아닌지. 음소가 아니라면 두 소리 중 무엇을 기저형으로 상정해야 하는지.

     

    영어의 [p] [pʰ] 라면 아래와 같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영어 데이터는 머리속에 내장되어있다고 가정하고 생략. 하지만 영어 데이터로 문제를 낸 적은 없음. 아래의 섹션3 참조.) 아, 물론 주어진 데이터 상의 datapoint를 언급해주는 것이 필수.

     

    1. In North American English, [p] appears after a sibilant (e.g., [INSERT DATAPOINTS HERE]) or word-finally (e.g., [DATAPOINTS]) while [pʰ] only appears in the word-initial position (e.g., [DATAPOINTS]).
    2. These environments are complementary.
    3. Therefore, they are allophones in this language, with the underlying form being /p/, which appears less restrictively.

     

     

    2.2 예시2: "음운 규칙에 따른 출력형"

    이런 종류의 문제는 음운 규칙을 제시하고 이 규칙을 거쳐서 어떤 표면형(SR)로 도출되는지 물어본다.

     

    길게 쓸 것 없이 이렇게 세 문장 쓰면 만점이다:

     

    1. UR을 뭐라 상정했는지
    2. 규칙적용된 중간형
    3. SR

     

    구체적인 예로 한국어의 두 음운규칙인 '음절말장애음단순화' Complex Coda Simplification 와 '장애음뒤경음화' Post-Obstruent Tensification의 예를 들면 아래 표와 같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문장 쓸 것도 없이 아래 표처럼 그냥 슥슥 써내도 만점 줄 것 같다. 아, 물론 음운론자들은 쪼잔하기 때문에 / / 나 [ ] 기호 똑바로 안 쓰면 감점할지도 모름.[각주:1]
     
    /nʌlp-tɑ/ 'broad' → [nʌlt*ɑ]

    UR /nʌlp-tɑ/
    POT nʌlpt*ɑ
    CCS nʌl t*ɑ
    SR [nʌl t*ɑ]

     
     

    3. '문화적' 편향성

    여러가지 이유로 음운론 시험에서는 특정 영단어를 주고 그것의 발음을 전사하라는 task를 주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다. 첫째, 그것은 음성학이지 음운론이 아니다. (음성학 미안😂. 맞아 또 dumping하는거야) 둘째, 모든 화자의 발음이 조금씩 다 다른 현실에서, 어떤 단어를 주고 전사하라는 요구사항은 잘못하면 규범주의prescriptivism으로 귀결되고, 잘 해봐야 중구난방이 되어 버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IPA를 제시하고 그게 무슨 단어인지 알아맞추는 문제는 많이 낸다. 이런 문제는 IPA를 읽을 수 있냐를 평가하는 문제가 된다. 전제는 표준적 북미 영어발음을 이미 알고있다는 것.
     
    혹은 아무런 데이터도 제공하지 않고 영어에서 어쩌저쩌한 음소적 대립을 보이는 단어쌍을 제시하라는 문제도 낸다. 이것은 최소대립쌍의 개념을 아는지를 평가하는 문제인데, 전제는 영어 렉시콘이 어느정도 머릿속에 있다는 것.
     
    일단 일반적인 관행은 이러하다. 그런데 모 학기 개론 수업을 하면서 이러한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 학기에 TA는 세 명이었는데, 나 말고 나머지 두 명은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 영어가 모국어였다. 그 중 한 명이 "이 문제들에서 영어지식을 전제하는 것이 문화적으로 편향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사실 그 친구는 계속 내가 맞장구쳐주기를 기대했던 것 같은데, 나는 이것을 약간의 필요악? 정도로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내가 나이들어서 덜 민감한건가?) 영어로 시를 써내라는 것도 아니고, 아주 높은 영어 구사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수업에서 사용되는 working language를 영어로 하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일정 정도의 영어지식은 당연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분석해야 할 데이터로 영어나 한국어나 일본어나 중국어가 나왔다면 그것이야말로 "문화적으로 편향된" 시험일 것이다. 실제로 그 학기 시험문제에 나온 데이터는 Proto-Bantu, Isthmus Zapotec (멕시코 인디오 언어), 그리고 Pulaar (Niger-Congo) 이렇게 세 가지였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언어학과가 막 영어를 강요하면서 막 '헐? 영어도 못하면서 언어학 공부한다고? 영어 못하면 재수강하면서 배우시던가 ㅋㅋ' 이런 분위기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사실 내가 학교 입학하고 느낀건데, 3학년 4학년 학부생들이 영어학(English linguistics)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개론수업에서나 bootstrapping을 위해 영어 데이터를 사용하지, 학년이 올라가면 영어 데이터를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엔가? 언어학과의 상위단위인 Faculty of Arts에서 '교육과정 이수를 위한 필수적 영어실력에 관하여'였나 뭐시기였나 성명을 낸 적이 있는데, 우리과 원로교수 포함한 여러 교수들이 실명으로 '그거 개소리. 우리과는 안 따를 거임' 한 적도 있었다.
     
    Faculty of Arts에서 말하던 건 이런 요지였다. "영어권 학교에서 대학교 공부하면서 영어로 페이퍼 한 장 제대로 쓰지 못하면 안 된다. 에세이에서 내용뿐만 아니라 영어 글쓰기도 평가요소에 넣자."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대해 논하시오 이런 논제에 에세이를 내면, 그거 평가할 때 내용의 타당성과 창의성 뿐만 아니라 영문법을 잘 지켰는지, 글의 구성이 잘 되어있는지 등도 평가점수로 넣자는 이야기다.
     
    애초에 섹션2 (간결하게 써라)에서 언급했듯, 학부 언어학 에세이 문제에서는 애시당초 긴 글 쓰기를 안할 뿐더러, 교수들도 학생들 긴 글을 읽는 걸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학과에서 '글쓰기 평가'에 반대했던 더 큰 이유는 그것이, 언어학자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화를 낸다는 규범주의prescriptivism의 발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4. 목적보다는 과정

    이것도 언어학의 특징인가 싶은데,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결과는 어떠한 "대의"라든가 "당위"를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다고 꼭 짚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학부생들의 답안 중에는 당위나 대의에 호소하는 답안이 많았다. "언어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 해야 하므로" 등등. 사실 문제는 '주어진 데이터 한도 내에서 특정 패턴을 파악하고 그 데이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라' 정도의 에세이 문제였다. 데이터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환경을 다 커버하는지 우선 살피고 그렇지 않으면 패턴에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물론, 언어보존 등등의 대의나 당위가 중요하기는 할 테지만, 그것은 이론언어학 외부적인 문제일 것이다. 사실 학부생들의 답안지에서 이런 이야기가 너무 나와서 학생들 수업할 때 한 번 전체적으로 지적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섹션2 (간결하게 써라)와 연결지점이 있다고 보이기도 하고, 섹션3 (문화적 타당성)에 따른 역차별 지점으로 보이기도 하고...) 
     
    시간이 몇 년 지나 이제 돌아보니, 이러한 '기계적'(?) 혹은 '냉혈한스러운'(?) 성격은, 어떤 면에서는 개별언어학(국어학, 영어학, 불어학)이 아닌 일반언어학이기 때문에 강조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언어가 소멸위기에 있으니 이 데이터로 억지로라도 결론을 내야한다, 는 "영어/한국어/불어 데이터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는 언어학은 쓸모없다" 만큼이나 거짓된 주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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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쓸데없는 여담이지만 직업병/발작버튼 눌려서 적는데, '음절말장애음단순화' 랑 '장애음뒤경음화' 이렇게 두 규칙은 역출혈(counterbleeding) 규칙순이다. 😂😂😂 무슨뜻이냐하면 POT 먼저 적용되고 CCS 적용되는 실제의 규칙이 반대로 적용되었더라면 CCS가 POT를 bleeding했을텐데 실제로는 그러지 않는다(counter-) 라는 이야기! 세상에나 거진 막 5년 6년만에 '규칙순'을 머리속에 떠올리는 것 같은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 보면 feeding, bleeding, counterfeeding, counterbleeding이 나에게 주었던 정신적 트라우마가 엄청났나보다. 이게 뭔소린가 궁금하면 [euijuworld :D 님의 블로그 포스팅] 클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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