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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으로 박사유학/언어학 박사 생활하기

'멀리'를 위해 기여하는 생활

sleepy_wug 2023. 3. 30.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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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요약

어떤 삶은 당장 '지금'과 '여기'보다는 지금은 보이지 않은 미래와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먼 곳을 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나 자신을 향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아도 되도록 사회에서 도와주기 때문에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멀리 멀리 아주멀리

 

1.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월말이 되어가고 있다보니 heroku에서 서비스해주는 내 앱들의 사용시간을 돌아보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글을 입력하면 IPA로 자동 전사를 해주는 웹앱[링크]의 사용시간이 거의 1천시간에 달했다.

 

한달에 1천시간이면 하루에 33시간. 하루는 24시간이니까 적어도 동시에 여러명이 이용했다는 뜻.

 

지난 한 달동안 정작 나는 다른 일로 바빠서 이 앱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계속 사용하였나보다. 나는 내가 세상 쓸모없는 걸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계속 사용이 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학계에 기여한다거나 하는 생각 같은건 없다. 심지어 저 웹앱의 배포와 이 블로그는 표면상 익명이기 때문에 나에게 credit이 오는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게 감사해야 할 일인 것인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딱히 모르겠다.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감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 것인가...? 아마도 내가 화용론을 전공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감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감사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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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젠가'와 '쩌어어어기'

동물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언어를 구분짓는 요인은 다양하다. 통사론자라면 merge와 displacement를 말할 것이지만, 의미화용론자라면 '현실 이면에 대해 말하는 능력'을 떠올릴지 모른다. 개나 늑대의 하울링이나 새의 울음소리 그리고 꿀벌의 비행은 의사소통의 수단이지만 언어는 아니다. 이러한 동물들의 의사소통 표현은 항상 '지금'과 '여기'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언어는 당장의 맥락에 무관한 표현을 할 수 있다.[각주:1] 많은 언어는 문법장치로서 '비현실법'(irrealis mood)를 가지고, 비록 명시적인 문법 장치가 없더라도, 비현실에 대한 가정이나 미래 그리고 과거를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언어는 극히 드물다. Irrealist mood 뿐만 아니라 서법(mood) 전반이 인간언어만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Berwick & Chomsky (2017)[각주:2]는 화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그것에 대하여’ 말하거나 심지어 진실이 아닌 상황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의 뇌와 기타 영장류의 뇌를 구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주장했다.

 

 

내가 만든 웹앱과, 내가 하는 연구도 당장의 효용이 없다. 그것들은 '지금여기'가 아닌 '언젠가'와 '쩌어어어어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동물의 의사소통보다 인간의 언어에 가까운 것 같다. 이처럼 순수학문 연구자의 직무는 오지않을 미래와 보이지않는 먼곳을 위해 존재한다.

 

 

식탁위에 반찬하나 올리지 못하는 이런 직업은 사실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에 사람이 부족하다 하면, 농사짓고 공장에서 노동할 사람이 부족하지 언어학자가 부족할 리는 없다. 언어들의 일반법칙이나 보편성 특수성 따위는 모두 '유희'일 따름이지, 그것이 밝혀지지 않는다고 하여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생기지는 않는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사회에 기생하는 것 같다.

 

3. 당장 효용이 없는 걸 왜 하는가? 오히려 나자신을 위해서

그렇다면 이런 불필요한 일을 왜 하는것일까? 아무도 나를, 연구자들을 가둬놓고 협박하지 않았다. 그 어떤 사회에서도 쓸모없는 짓을 하라고 연구자들을 가두지 않는다.

 

결국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일 뿐 우리가 잘사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땀흘리고 노동하는 '건전한 하루, 보람찬 하루'(an honest day's work)를 보내지 않고도 연구하는 명목으로도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것을 용인해주었기 때문이지 결코 떳떳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감사의 방향은 나에게서 바깥으로 향하는 게 맞다. 그러므로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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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장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언어로 하는 일 중 가장 큰 특징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 Berwick, R. C., & Chomsky, N. (2017). Why only us: Language and evolution. MIT Pres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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