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보니 음운론 전공하는 내가 박사자격논문은 통사론으로 쓰고있다.
통사론을 멋있다고 생각했고, 애초에 석사과정에서 통사론을 전공하려고 했었긴 하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그렇지만, 나는 철저히 '관중'의 입장이었고 통사론에서 새로운 논문을 쓴다거나 하는 건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속해있는 과정은 코스웍과 박사논문 이외에도 자격논문을 2편을 써야한다. 한편은 차용어음운론으로 써서 완성했다. 다른한편의 주제도 내가 1차학기일 때 결정되었는데, 너무 서둘러서 결정한 감이 있다. 사실 후회를 많이 한다.
1차학기때 (나의 지도교수님들 3분으로 구성된) 커미티와 함께한 미팅에서, 2번째 자격논문 주제로 다양한 후보를 탐색했었다. 난 사실 여러 주제중 음운이웃 토픽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고려대 남기춘 교수님의 논문들을 정리해서 어떤 thesis를 들고 갔었는데, 커미티에 있으셨던 K 교수님이 시큰둥했다.
2건의 자격논문은 서로 다른 분야를 다루어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들고간 음운이웃 thesis가 첫번째 자격논문의 주제와 너무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1차학기때 듣던 통사론 과목의 기말페이퍼 주제를 확장하는 안건을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고, 어쩌다 보니 그것으로 결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첫번째 자격논문이 발등의 불이었고, 두 번째는 정말, 시간이 어떻게든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나보다. 사실 통사론 기말페이퍼 자체도 그닥 탄탄하지 않았지만, 그때 이미 그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정말, 가소롭게도, 통사론 논문을 쓴다면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어쩌면 '내 인생에 통사론으로 논문을 써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뭔가, 자신의 세부전공이 아닌 타분야의 논문을 쓰기에 박사과정 생활할 때가 인생의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서울대 언어학과의 고희정 교수님은 통사론자신데, Journal of East Asian Linguistics에 게재된 음운론 논문이 한 건 있다. (링크). 그 논문 자체도 멋져보였고 교수님도 멋져보였다.
어쨌든 그때의 잘못된 선택(?)으로 지금 고생에 고생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자격논문으로 무엇을 쓸 것인지 처음 결정했던 커미티 회의 날과 비교해서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국어, 통사론, 이 두가지 키워드만 남았다. 주제도 변경되었다. clausal complement와 finiteness로 확정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커미티 구성원도 그 주제에 맞게 달라졌다. 애초에 음운이웃 주제에 반대했던 K교수님은 커미티를 떠났다.
사실 자기전공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분야의 논문을 쓰는 건 어쩌면 천재들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완전 문외한은 아니더라도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쓰려니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린다. 코로나 핑계를 대자면 댈 수도 있는데, 그래도 코로나 치고도 너무 지연되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건 내가 첫 단추를 잘못 끼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음운론 연구를 발표하고 질문받을 때는 답변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질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버거운 것 같다. 그래도 기왕에 시작한 것, 죽이되든 밥이되든 끌고갈 수밖에 없는 상황.
1차학기때 너무 조급해서 첫단추 잘못 낀 것을 후회한다. 돌아간다면, 그 자리에서 확정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1주일만 시간을 더 달라"고 할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주눅들어있었고 "시간을 더 달라"고 말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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