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한국에서 공부를 쭉 해오다가도 대학원 학위를 위해서는 꼭 유학을 가야하는걸까? 나는 원래 상당히 회의적이었는데 요 몇년 사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연구나 공부 자체가 아니라, 대가와 인간적으로 만나보는 경험이나 기타 학문 외적인 경험을 위해서 유학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있는데, 학문을 하면서 좀 대담해지고?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 유학은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엉덩이를 한국에 붙이고 있건 다른 나라에 붙이고 있건, 논문을 읽고 쓰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을 수 있다. 지구상 어디에 있건 대체로 똑같은 온라인 리소스에서 자료를 찾아서 보게 된다. 한국어를 대상으로만 연구한다면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자료 구하기에는 더 용이할 것이다. 심지어 실험언어학/현장언어학을 한다면 자신의 연구언어가 사용되는 지리적 위치에 가서 연구하는 게 옳다.
그러나 연구 외적으로 경험을 위해서라면 유학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 멀리서 보았을 때 신비롭고 멋있어
학계에서 아주 유명한 교수님이 있다. 흔히 '지도교수님의 지도교수님'으로 불리는 연구자들 말이다. 나 역시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런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 수업을 듣고 발표를 다니고 논문 draft를 circulate하시면 열심히 읽었다.
그분은 나이도 많고 백발이어서 도사? 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그 교수님의 수업을 수강할 때는, 강의가 아침 일찍 9시에 있었는데, 그 교수님은 매일처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서 한손에 헬멧을 들고 강의실에 짜잔 하고 나타났다. (지금은 면도를 하지만) 그땐 흰수염을 기르고 있었기에 왠지 더 멋있어보였다. 백팩에서 아이패드 꺼내서 그대로 수업을 하는 모습이 책에 나오는 '괴짜 천재' 같은 느낌이면서도 정말 건강해보였다.
기말페이퍼에 코멘트를 받았을 때는 대가로부터 코멘트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영광이었다. 커미티에 들어와 달라 부탁을 드려서 커미티에 그분을 모셨었다. 덕분에 그분 서명을 온갖서류에 받았었다. 그러나 그분은 곧 연구년(sabbatical) 받아서 학교를 떠나셔서 안타깝게도 커미티 멤버는 다른 분으로 교체되었다.
첫 커미티 미팅을 그 교수님 연구실에서 했었다. 커미티 구성원 교수님 3분과 내가 연구실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서 했는데, 책장마다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고 화이트보드에 OT Tableaux가 그려져 있는데 왠지 너무 전형적인 '언어학자의 연구실' 느낌이었다.
사실 교수님들끼리는 서로의 연구실에 들어갈 일이 없다보니, 그 대가 교수님의 연구실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님들에게도 신기했던 모양이다. 커미티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교수님이 자신도 모르게 '오 나랑 똑같은 책이 있네요!' 라고 말하였고 서로 머쓱해졌다. 그 멘트는 순수하고 나이브해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교수님들도 나랑 마찬가지로 그 교수님을 존경한다는 것/약간 어렵게 느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 함께 일해보니 역시 사람이더라
그 대가의 연구실에서 이번학기에 매주 미팅을 하고 있다. 이번에 강의하시는 학부 수업에서 내가 조교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일을 해보며 강의실 밖에서 '강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하다 보니, 이 교수님의 허술한 모습이 보이고 아 역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생각보다 늦잠을 자고 오전이 없으신 분이라는 알게되었다. 아침수업을 하셨던 그때는 정말 예외적으로 아침수업을 했을 뿐이지, 정말 아침수업 안 좋아하시는 것 같음. 오전에는 이메일 자체가 답장이 없으시다. 미루다가 나중에 가서야 데드라인에 촉박해서 일을 한다. 실라버스도 늦고 수업자료도 마지막에 가서야 완성하신다. 뭔가 철저하고 완벽하실 것 같은 모습에 긴장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또한 매우 오타가 많고 생각보다 글을 잘 못쓰신다. 사실 그분은 논문과 책을 친절하고 이해하기 쉽게 잘 쓰시는 걸로 유명하신 분이다. 심지어 나의 한국 석사 지도교수님도 그 대가 교수님을 '교과서 친절하게 잘 쓰시는 분'으로 기억하실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의 글은 투박하고 불친절하다. 다만, 조교들의 말을 정말 잘 들어주는 오픈 마인드라서 오타 수정 즉각즉각 해주고 설명이 잘 이해가 안간다면 쉽게 더 쉽게 수정을 하신다.
매우 엉뚱하시다. 미팅을 하다가 샛길로 빠져서 한참을 재밌게 얘기하느라 미팅이 길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마지막으로 수업자료를 '효율적'으로 만드신다. 이말인즉슨, 3학년 과목과 4학년 과목 수업자료를 같은 걸 쓰신다! 정확하게는 데이터를 같은 걸 쓴다.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3학년 과목에선 데이터 분석보다는 설명과 강의를 주로 하고, 4학년 과목에서는 학생들이 데이터 분석을 하고 교수는 질문에 답해주는 스타일로. 이건, 솔직히 나에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내가 들었던 수업은 학부4학년-대학원생 code sharing 수업이라서 사실상 이번에 강의하는 학부4학년 수업과 같은 수업인데, 난 엄청나게 준비를 해오시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실제로는 전날 다른 수업(3학년 수업)에서 썼던 자료라는 것.
너무나 완벽해서 도사로 보였던 그 대가는 그냥 약간 게으르고 약간 엉뚱하고 실수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엄청난 위로가 된다. 공부를 하면서 접하는 논문과 연구자들의 '겉모습'은 상당히 다듬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 '범접할 수 없이 완벽'해보인다. 마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하지 못할 경지에 있는 사람들'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과정 상에서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일 따름이고 그래서 나도 과정에서 완벽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유학생활에서 배우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만들어진 결과를 멀리서 접하는 게 아니라 '연구와 강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
3. 학회 화장실에서 만난 '교과서 저자'
여담으로 박사 1년차때 이런 일이 있었다. 동부에서 열리는 학회를 갔었는데 Plenary lecture 도중 너무 화장실이 가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강의가 별로 재미도 없어서 더 그랬나보다. 슬쩍 나와 화장실에 갔는데, 내가 섰던 소변기 옆에 누가 슥하니 왔다. 무심코 옆을 봤는데 UCLA의 Bruce Hayes가 오줌을 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어찌해야 할지 패닉이 왔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만난 적이 없는데? "교수님! 팬이에요"도 이상하고, "교수님의 음운론 개론 교과서로 공부했었음. 야 너 책 좋더라?" 이런 얘기 하면 어색할까? 아니 그것보다 오줌싸고 있는 사람한테 갑자기 말 거는 것 엄청 이상한 거 아닌가?
정신 못차리고 있다가, 아 역시 모른척하는 게 쿨한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나왔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일부러 Hayes 가 앉은곳을 찾아서 옆에 앉고 그랬다.
그런데 오랫동안 대학원에 있으니까 Bruce Hayes를 몇 번이고 다시 만났다. 학교에서도 만나고 세미나에서도 만나고 학회에서도 만나고... 여전히 존경하는 것은 맞지만 몇년 전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도사'나 '대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그 교수님과 함께 일을 한다면 더 demystifying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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