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https://linguisting.tistory.com/67 ← 이 글에서 소개한 Hangul to IPA 프로그램에 대한 후일담이다. 2주간 주말동안 살짝살짝 건드렸는데 이제 일단은 더 추가하고 싶은 기능은 없다. 오류가 발견된다거나 (높은 확률로 내가 쓰다가 오류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음) 조금 리팩터링이 필요하다거나 하다면 그때 다시 코드를 열어볼 수는 있지만 일단 묻어둘 생각이다.
1.
사실 이것은 내가 석사때인 2016년에 짰던 R코드를 기초로 약간 손보고 웹 유저 인터페이스를 입힌 것이다. 그것은 형태론적으로 단순한 어휘목록에 음운규칙을 아주 단순히 (아주 SPE적인 수준에서) 적용하는 기계였다. 강범모 김흥규 2009 [책링크] 한국어 어휘목록을 집어넣으면 규칙적용형(논리적 표면형)이 나오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나와 석사 지도교수님이 이걸 가지고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K-SPAN (Holliday, Turnbull and Eychenne 2017) [논문링크]이 나와버렸다. 결국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프로젝트였다. 1
이번에 했던 주요한 일은 사용자로부터 입력을 받는 인터페이스를 만든 것이다. 웹디자이너가 결코 아니기 때문에 '미려한' 앱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기에, 외양은 그냥 나름 만족한다.
시작이 R코드였기도 했고 그 때문에 오랜만에 RStudio에서 모든 작업을 했고 옛 생각이 나서 Dash app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후회한다. plotly는 이제 dash r을 유지보수(maintain)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만약 이것을 백지부터(from scratch) 시작했으면 당연히 Python으로 짰을 것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R을 쓰려니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2. 한국어를 바라보는 내재된 편향
Hangul to IPA 에서 구현된 많은 음운규칙들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음성-음운 접면(Phonetic-Phonology interface) 규칙 2개가 있다. '공명음 간 장애음 유성음화'와 '유음 /ㄹ/의 이형태 [l ~ ɾ] 선택'이 그것이다. 이것은 일단 음소 대치를 유발하지 않으므로 다른 규칙들에 비해 저수준의 작용들이다.
그런데 나는 왜 유독 두 가지 작용만 추가한 것일까? 구개음화를 기왕 추가할 바에야 /ㄴ/의 이형태 [n~ȵ] 선택이나, 또 /ㅅ/의 이형태 [sʰ ~ ɕ] 선택은 왜 추가하지 않은건가?
처음, Hangul to IPA에 필수 규칙들만 구현한 후에 나온 결과는 내 직관 상 뭔가 매우 어색했다. IPA 전사를 내가 안하고 기계에게 시키려면, 기계가 나처럼 전사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기계의 결과물은 나의 IPA 전사 방식과 달랐다.
'기본'을 [kipon]이라고 전사하고, '나라'를 [nala] 라고 전사하면 어색했다. '기본'은 [kibon]으로, '나라'는 [naɾa]라고 전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Hangul to IPA는 기계이니 만큼, 철저하게 한국어 음소 간 대치만을 고려하여 [kipon], [nala] 라고 전사했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옳다.
나는 한국어 표면형을 전사할 때 여태껏 무의식적으로 공명음 간 장애음은 유성음으로 (한국어 자음 인벤토리에 유무성 변별이 없는데도!) 쓰고 유음을 철저히 [l] 과 [ɾ]로 구분해서 전사하고 있었다. /ㄴ/의 [n~ȵ] 선택이나 /ㅅ/의 [sʰ ~ ɕ] 선택은 '그저 음성적인 부분'으로 치부하여 broad transcription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저 음성적인 부분'인 /ㄹ/과 장애음의 사례는 narrow transcription하면서!
왜 그런 건가? 이유는 간단하다. 영어에서 [l] 과 [ɾ]이 다른 음소이고 영어에서 유무성 변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n~ȵ] 선택이나 [sʰ ~ ɕ] 선택이 영어에서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안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바라보고 기술하면서 자연스레 '비교값'으로의 영어를 무의식적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변명을 하자면
어쩌면 이것은 내가 학부와 석사를 영어영문학과를 나오고 영어권에서 유학을 하고 있고 영어로 논문을 쓰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계가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그 사람의 백그라운드가 어느정도는 개입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음성전사(transcription)라는 것은 솔직히 도제식(!)이 아닌가?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한국어 발음을 narrow transcription을 하겠다고 든다면 얼마나 깊게까지 할 건데? '식이요법'을 [ɕʰiɡijo̞bʌ̹p̚]으로 전사하는 수준까지 할 것인가? 만약 아니라면 어디에선가 선을 긋기는 해야할 것이 아닌가? 따라서 대상독자가 영어권 화자라면 혹은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영어적(?) 한국어 전사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또한, 내가 무의식적으로 전사하는 두 음성규칙은 그 나름의 '음운론적 이유'가 있다.
'공명음 간 장애음의 유성음화'는 '평음'에만 적용되고, 격음과 경음에는 적용되지 않기에 '평음'을 판정할 수 있다. 한국어의 ㅅ과 ㅆ은 모두 장애음이지만 유성음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평음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음운론적으로 의미가 있다.
'/ㄹ/의 변이음 선택'의 문제는 Lee (2001)[논문링크]에서와 같이 한국어의 멜로디를 mora로 보아야한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또한, 차용어음운론의 측면에서도 고유어와 외래어 사이에서 유음(liquids)이 [l]와 [ɾ] 중 무엇으로 실현되느냐가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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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lliday, J. J., Turnbull, R., & Eychenne, J. (2017). K-SPAN: A lexical database of Korean surface phonetic forms and phonological neighborhood density statistics. Behavior research methods, 49(5), 1939-1950. https://doi.org/10.3758/s13428-016-0836-8 [본문으로]
- Lee, Youngjoo. 2001. A Moraic Account of Liquid Alternation in Korean. Ms. ROA-48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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