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어학전공은 대부분 영어권 대학의 언어학과로 유학갑니다. 언어학과 진학시 개별어(=한국어)와 방법론 두 토끼를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둘 다 완벽할 수는 없으므로 한 가지 테크트리를 분명히 타세요.
1. 영문과와 언어학과는 다르다
저는 한국의 인서울 대학 영어영문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공부를 했습니다. 음운론을 전공했고, 서연고 서성한 등 이름있는 대학 출신이 아닙니다. [저의 이야기]
유학원 같은거 근처에도 안 가고 혼자 지원했고, 다행히도 세 군데에서 합격통보를 받았고 캐나다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넉넉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생활비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얼마 받는데?]
영문과에서 어학, 즉 영어학을 공부하면, 박사과정은 영어권 대학의 언어학과(Department of linguistics)로 가게 됩니다. 물론 응용언어학이나 교육, 혹은 영어학과 로 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은 언어학과에 진학한 저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언어학과와 영어영문학과는 엄밀히 말하면 교육과정이 조금 다릅니다. 두 과의 패러다임 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심의 범위가 다릅니다.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하는 어학은 아무래도 관심의 범위가 한국어와 영어에 국한되기가 십상입니다. 국내에도 서울대와 고려대 등에 언어학과가 있는데, 그러한 학교들에서 공부를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공부의 범위와 방향이 개별언어 한 두가지에 국한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어영문학과의 경우는 최종 논문에서 영어라는 한 개별언어에 대한 포커스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한국어 분석으로만 영어영문학과 석사 졸업논문을 쓰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외국에서도 한국의 서울대 연고대 카이스트 정도는 안다고 하지요? 제가 학부와 석사를 한 대학은 그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과 역시도 영어영문학과입니다. 그렇다면 언어학과로의 진학을 염두에 두고 유학 준비를 할 때 어떻게 SOP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논문실적) 등 준비서류들을 준비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 개별어(=한국어)와 방법론 두 마리 토끼를 잡으시되, 방법론에 대한 강점을 어필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2. 개별어(=한국어)를 강조하라
제가 이쪽 테크트리를 타지 않아서 불확실할 수 있습니다.
미국/캐나다 대학들 중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한국인 박사과정생을 뽑는 대학들이 있습니다. 제가 시장조사를 전부 한 것은 아니지만, 하와이대 Manoa캠퍼스, 코넬, 델라웨어, MIT, 맥길 언어학과 등이 이런 대학들인 것 같습니다. 학교 자체가 한국어 연구를 계속 해오던 곳일 수도 있고, 교수의 연구방향이 한국어를 대상언어로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대학교에 지원할 때에는 지원자 본인이 한국어 원어민 화자이고 한국어에 대한 연구를 같이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저처럼 외국 교수들이 모를만한 대학에서 학부/석사를 하신 분들은, 미국과 캐나다의 언어학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방법론을 접해본 적이 있다는 점은 언급하셔야 합니다. 음운론의 경우 기본적인 최적성이론이나 심리언어학적 음성실험 등을 배웠거나 그걸 써서 연구를 해본 적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쪽 테크트리를 타시려면, 한국어에 대해 심도있지는 않지만 진지한 연구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겠지요. 텀페이퍼가 되었건 학회에 발표신청을 했는데 떨어진 프로포절이 되었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시면 강점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혹은 해당 대학들에 이미 재학 중인 한국인 과정생들에게 연락을 해보고 올해 추가로 학생을 뽑을 예정인지, 본인의 세부전공 (통사론, 의미론, 음운론, 음성학 등) 에서 TO가 날 것 같은지 미리 알아보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3. 독특한 연구방법이나 이론을 강조하라
독특한 실험방법이나 특이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해본 적이 있다면 굳이 한국어에 국한된 대학 리스트에만 지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시 뉴로사이언스와 접목된 연구방법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적(computation) 연구방법을 할 줄 아시나요? 그렇다면 이 점을 강조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물론 그러한 방법론을 사용하고 발전시켜오는 대학교에 지원하시는 것이 중요하지요. 아무 세부적이고 정말 한국에서 아무도 하지않는 것 같은 분야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들어, 최적성이론(Optimality Theory)을 통해서 통사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밀고나가고 연구성과를 내시는 편이 좋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우에는 코딩을 할 수 있고 컴퓨터를 이용해서 이론언어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틈새(niche)를 가지고 진학에 성공했습니다. 제 분야는 자연어처리(NLP)와는 조금 다른 부분입니다. 자연어처리는 언어 그자체보다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을 컴퓨터로 모방하고 기능적으로 인간과 동일 혹은 우월한 언어기능을 구사하는 부분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저의 영역은 인간의 언어습득과정을 계산적으로 모델링하고 컴퓨터를 통해 그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언어보편적으로 어휘부(lexicon)가 어떤 특정한 계산적 모형으로 귀결(converge)된다는 것을 컴퓨터를 통해 증명하는 등의 연구를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언어학에서 코딩능력은 컴퓨터와 상관없는 어떤 이론언어학 분야를 하시든 꼭 필요한 능력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음성학 및 음운론에서는 R을 잘 구사하는 것이나 Praat 스크립트 짜는 것이 옛날부터 중요했지만, 지금은 딱히 음성음운론이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분야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수 있다는 것이 큰 무기가 됩니다. 파이썬 공부 열심히 하세요!
4. 포트폴리오: 당연한 것이라도, 사소한 것이라도
본인이 해온 '언어학 공부'에 대해서 너무 사소해보이는 것이라도 그리고 너무 당연한 것이라도 명백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학기중에 진행하던 실험이 결국은 용두사미가 되었다고 해도, 그 실험 자체에 대해 포트폴리오에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학교에서 다 하는 거라 영어영문학과 어학 전공이면 당연히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라도 "수업에서 그것을 다루었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봅시다. 내가 한국 대학의 국어국문학과 입학사정 담당 교수인데, 이탈리아 소재의 대학교에서 한국어과를 나온 사람이 지원을 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제출한 성적표 상의 과목명만 봐서는 실제로 이 지원자가 구구조분석을 할줄 아는지, OT tableaux 그리거나 해석할 줄 아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물론 연구포트폴리오 상에서 분명하면 좋겠지만, 대체로 연구포트폴리오는 본인의 세부전공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세부전공(예를들어 통사론) 이외에 대해서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SOP를 통해서건 아니면 교수님들의 추천서 등 다른 채널을 통해서건, "이 지원자는 우리 학교와 비슷한 언어학을 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제 경우에는 입시용 블로그를 운영했었습니다. 영문으로 된 그 블로그에는 포스팅이 한 5개 정도 되었는데, 각 포스팅은 하나의 언어현상 (모두 한국어)에 대해 각각 제가 포착한 현상,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언어학적 방법론으로 검증할 수 있는지 가설을 세운 것,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한 노력들 까지를 적었습니다. 굳이 결론이 있지도 않았고, 그것의 함의나 이론적 정당함 (discussion 섹션에 해당) 은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포스팅들을 올리고 SOP마지막 줄에 주소와 QR코드를 넣었습니다. MIT나 다른 몇몇 대학의 경우 온라인 입학원서에 홈페이지를 적는 칸이 있어서 거기에도 블로그 주소를 적었습니다. 1
블로그 운영의 또 다른 장점은, 학생을 뽑는 교수 입장에서 영어 소통 능력에 대한 우려를 덜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초중고 그리고 학부와 석사를 국내에서 했습니다. 물론 어학연수를 가거나 교환학생을 가거나 했던 경험이 있을 수 있지만, 토종 한국인의 지원서만 단순히 보는 교수의 입장에서는 몇 년 빼고는 쭉 한국에서만 살아온 이 국제학생을 뽑아놓았을 때 과연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과 논문 작성을 잘 해나갈 수 있는지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한국학생을 뽑아본 적이 없었던 학교라면 더 그렇겠지요. 그런데 영문으로 된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것은 그런 우려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조금 덜어줄 수 있습니다.
5. 결론
물론 제가 적은 것들은 모두 제 경험이고, 저는 박사과정 입시생만 두 번을 해 봤을 뿐, 반대쪽 (즉, 학생을 뽑는 역할)에는 앉아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 떨어지고 한번 붙으면서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고 개선을 해보려고 노력하면서 체득한 교훈이라서 실제로는 효과가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중요한 것은 연구를 해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연구가 광범위하게는 지금 지원하는 대학들의 언어학과에서 해오는 방법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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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지난다음 알게 된 것인데, 제가 박사를 하고 있는 학과에서는 '계획서 쓰기'만을 여러번 하는 특강 수업도 있었습니다. 현상 포착 -> 가설 세우기 -> 그걸 검증하려면 어떤 접근을 할 수 있는지 까지만 문서로 정리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로 집행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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