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2026년 7월 31일에 방영된 '나혼자 산다' 658화의 한 장면을 차용어 음운론의 관점에서 '갑자기 분위기 언어학'해봅니다.
구성환과 이선민이 손글씨 메뉴판을 만드는데, 영단어 appetizer / 애피타이저를 쓰려고 하다가 "에피타이저"라고 뜨는 모습입니다.






구성환과 이선민이 상식이 없다, 무식하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혼동은 언어학적 이유가 있고, 실제로 Nam (2026)에 따르면 이 단어는 (i) 별로 잘 안쓰이고, (ii) 혼동률은 70%에 육박합니다. (대용량 언어자료에서 ᴀᴘᴘᴇᴛɪᴢᴇʀ가 50회 나왔는데, 그 가운데 35회가 "에피타이저"라고 썼음)

목차
1. 전부 혼동되지는 않는다
1.1 음운정보
영단어 appetizer는 한국어의 영어 차용어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지는 않는다.
형식주의 이론언어학에서는 모든 언어화자들이 단어를 쓸 때, 어휘집(lexicon 렉시콘)안에 등재된 표상(representation)을 꺼내서 사용한다고 본다. 최소주의(Chomsky 19951)를 표준으로 삼자면 어휘집 항목(어휘소 lexeme)은 음운정보, 통사정보, 의미정보 정도가 "자질묶음"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음운정보는 어떠한 소리가 나나에 관한 정보고, 통사정보는 통사범주(명사/동사/형용사/부사...)나 하위범주(어떤 단어랑 같이 나와야 하나) 등과 관련된 정보를 말하고, 의미정보는 말그대로 어떤 뜻이냐에 대한 정보다.
어휘집 안에 있는 이 정보들은 추상적이고 입밖으로 내거나 글로 쓰는 언어표현은 구체적이다. 언어는 이 간극을 연결하는 생성장치다.
이성민과 구성환에게도 ᴀᴘᴘᴇᴛɪᴢᴇʀ에 대한 어떤 추상적 지식(표상/어휘목록 등재형)이 있고, 위에 인용된 장면에서는 그걸 꺼내서 구체화하려고 한다. 참고로 작은 대문자(small cap)로 쓰는 것은 어휘집에 등재된 형태를 지칭할 때 쓰는 것이다. 즉, ᴀᴘᴘᴇᴛɪᴢᴇʀ는 <appetizer> 라는 구체적 철자형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어휘소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 단어의 음운정보도 가지고 있고, 통사정보도 가지고 있고, 의미정보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소리나는지 알고 명사라는 것도 알며 그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쓰는 단어인지도 안다.
그런데 어떻게 소리나는지 안다 는 건 대체 무엇일까?
한국어에서는, 한글로 분명히 쓸 수 있듯이 "달"과 "딸"이 구분된다. "오늘 달이 예쁘네요"라고 할 것을 "오늘 딸이 예쁘네요"하면 큰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 을 말하고 싶을 때, ㄷ인지 ㄸ인지 아는 것은 분명히 음운정보의 일부라고 할 수있다.
한편 영어에서는 전설모음 /æ/ /ɛ/가 변별되는 음소다. 이 두 소리를 바꾸면 의미가 달라진다. 두 소리를 혼동하면, '음성적으로'를 뜻하는 phonetically /fənɛtɪkli/를 의도했어도 '광기에 서려서' fanatically /fənætɪkli/ 라고 발음할지도 모른다. 혼동의 결과가 의외로 심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음운론자가 너무 음성적으로 디테일하면 광기일지도...ㅋㅋㅋ) 어쨌든 두 소리의 구분에 관한 정보가 무척 중요하다.
1.2 차용어와 혼동
그런데 어떤 소리 구분이 의미 차이를 유발하는지는 언어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외국어 어휘를 빌려서 쓸 때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빌려서 쓰는 단어를 "차용어"라고 한다. 돈을 빌려서 쓰면 차용증을 쓰는데, 단어를 빌려서 쓰면 차용증은 안 쓴다.
한국어는 ㄷㅌㄸ 구분을 하지만 영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한국어 화자들이 ㄷㅌㄸ를 d, t, tt로 엄격하게 구분해서 쓰는 것을 영어화자들은 따라오지 못한다. 한국어 화자들이 ㄷ으로 시작하는 모든 단어를 영어 d로 쓸 때, 영어 화자들은 종종 t를 쓰곤 한다. tt를 써야할 때가 언제인지는 영어화자들에게 늘 어렵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ᴀᴘᴘᴇᴛɪᴢᴇʀ는 영어에서 /æpɪtaɪzəɹ/로 발음된다. 앞서 영어에서는 전설모음 /æ/ /ɛ/가 구분된다고 했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어에서는 이 구분이 없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어화자들에게 있어서 고모음 /i/를 제외한 전설모음의 구분이 없다. 쉽게 말하서 예전에는 ㅐㅔ가 소리로 구분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음운론적으로는, 한국어 화자들의 전설모음이 병합되었다고 한다. 전설모음의 모음공간(vowel space)은 고모음이냐 고모음이 아니냐에 따라서만 구분되고 이렇게 나눠진 두 덩어리가 각각 음소라고 본다. (여담인데, 음운론자들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은 잘 처리하지 못하는지, 사실 다 자질로 바꿔서 생각하긴 한다.)

이러한 전설모음 병합으로 인해 구성환의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의) 어휘집에 ᴀᴘᴘᴇᴛɪᴢᴇʀ의 첫소리는 /æ/ 도 /ɛ/도 아닌 어떤 추상적 단위, E 같은걸로 표상되는 것일테다. 그리고 그 추상적 음소를 구체적인 철자로 표현할 때, 구성환과 이선민은 ㅔ라는 형태를 사용해서 "에피타이저"라고 썼다.
변별이 없고, 그래서 혼동이 된다는 건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놀랄 일은 방향성에 있다. 꽤 흥미롭게도 ㅐ → ㅔ로의 혼동 방향은 '대미지'('데미지'로 혼동), '내비게이션('네비게이션'으로 혼동) 등과 같이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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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p/, /t/는 혼동되지 않는다
또 신기한 것은 한국어에 없는 소리 구분들이 모두 혼동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첫 모음만 혼동되었다.

/æpɪtaɪzəɹ/ 에서 /p/, 철자형으로 <p>도 혼동될 가능성이 있는 소리다. 한국어 ㅍ은 영어 원어에서의 /p/, /f/를 모두를 표현한다. 파일(file)과 파일(pile)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성환과 이선민은 애피타이저를 영어로 쓸 때 f를 쓰지 않는다.
아마도 한국어 화자들은 /p/와 /f/에 대한 구분을 음운적으로는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구체화할때(음성화, 철자화) 하나의 단위로 나올 뿐.
2. 철자를 수용하는 게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한다면, 영어단어를 받아들이는 것이 철저히 철자의 차용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appetizer라는 철자가 받아들여지는 것이 우선이고 그것의 소리가 잇달아서 온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혼동의 순간이 달라진다. 위 영상에서와같이 어떻게 철자를 쓰냐에서 혼동이 오는 게 아니라, "(철자는 appetizer로 고정되어 있고) 발음이 아피티제르냐 애피타이저냐" 이렇게 발음에서 와야 한다.
3. 관련 글
사실 이 블로그에서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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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msky, Noam. (1995). The Minimalist program. The MIT Pres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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