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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집

말소리의 음운론적 관계

sleepy_wug 2025. 8. 10. 08:03

0. 요약 

말소리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말소리는 음운론적 관계 속에 있습니다. 음소는 말소리를 기반으로 쌓아올리는 허상이며 '개념'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음소는 물리적인 특성이 없습니다. 가장 기본인데 이걸 쓰고 있자니 많이 민망합니다. 이 글은 말소리의 음운론적 관계와 '그놈의 음소'를 다룹니다.

 


 

목차

     

     

    1. 서론이 깁니다

    1.1 명칭 정리부터

    우선 명칭부터. '음소'는 phoneme을 지시하기 위해 쓰는데, 아마도 국어학에서는 '음운'이라 부르는 게 더 익숙한 듯하다. 명칭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적어도 이 글에서는 음소라고 계속 부를 것이다.

     

    국어학에서 쓰는 '음운'과 '음소' 개념: 언어학과 다르다

    저는 학부와 석사를 영어영문학과에서 하고 현재는 캐나다에서 언어학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일반언어학 연구자들이 늘 그러하듯 저도 개별언어학(영어학, 일어학, 국어학)에 대해 비판적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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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계속 '말소리'라고 적을 것이나 단순히 입말의 말소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수어의 제스처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고자한다. LPQ 이후에 교훈을 얻지 못했다 욕먹을지도 모르나 욕먹을 각오를 하고, 내 손가락의 건강을 위해 그냥 말소리 라고만 계속 적겠다.

     

    음운론 연구에서 수어의 위치에 관한 단상들

    0. 요약곧 저널 Language에 실리게 될 Law, Power & Quinto-Pozos 논문 manuscript가 돌고있다 (이하 LPQ). 우리 리딩그룹에서도 circulate되어서 덕분에 나도 구해서 같이 읽었다. 리딩그룹에서 (여러의미에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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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실체와 개념의 구분

    수업을 하다보면 2학년 음운론(개론) 수강하는 학생들이 특히 어려워하는 지점이 몇 곳 있다. 조음음성학, 말소리의 음운론적관계, 음운자질 이 순서다. 뒤로 갈수록 관념적이고 그래서 음운의 관심이다.

     

    조음음성학과 말소리의 음운론적관계는 보통 수강취소(drop) 가능 기간 이전에 다루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 생각하는 학생들이 수강취소를 한다. 그래서 이 토픽을 다루면 진짜로 실시간으로 강의실에 학생이 줄어드는 걸 볼 수 있다. [각주:1]

     

    음운론 개론에서 다루는 조음음성학은 그저 '암기과목' 정도의 기초적인 수준만 다루기 때문에, 크게 어려워하지 않는다. 단지 처음보는 기호들과 음성적 범주들이 다양하므로 얼마나 암기력이 좋으냐가 관건이랄까? 그저 말소리를 정해진 범주에 맞게 분류하고, 범주에 따라 기술된 지칭어를 잘 해석만 할 줄 알면 된다.

     

    그러나 말소리의 음운론적 관계에 들어가는 순간, 음운론적(추상적) 사고가 시작되고 학생들 사이에 "오개념이 교실을 배회하기도" 한다.

     

    음운론은 말소리를 일종의 '기초단위'로 당연 상정한다. 무슨 말이냐면 더이상 도구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t], [p], [k] 이런 식으로 음성학적 기술이 되어있으면 이것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 위에다가 자연부류 음운론적 관계니 하는 '음운론적 범주화'를 하거나, 혹은 반대로 그 속을 파고들어 어떤 음운자질로 구성되니 하는 '분석'을 하는 것이 음운론자들의 직무다. 밑줄친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말소리의 편향적 분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왜 그걸 설명해야 하는가? 그게 바로 음운론의 일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말소리(혹은 제스처)로 구성되는데 말소리 단위는 편향적 분포(skewed distribution)를 보인다. 음운론은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어하는 학문이다. 편향적 분포라고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하면, "언어에서 말소리는 아무 소리나 아무 곳에나 나오는 게 아니라, 특정 소리가 특정 맥락에서 나오더라" 이런 관찰이다.

     

    한국어의 예를 들어보자. 한글로 쓴 글이니 한국어를 안다고 전제한다. 한국어에서는 음절 끝에 [p, t, k] 같은 장애음 소리가 나올 수 있는데 이땐 입이 막힌 게 뚫리지 않는다.[각주:2] 합죽이가 됩시다 합. 하고 입을 다물듯, 자음으로 음절이 끝나면 발성기관이 다물어진다는 관찰이다. 그런데 음절 초반에는 나올 수 있는 장애음 종류가 좀 자유롭다. [s] 소리도 나올 수 있고 [pʰ] 소리도 나올 수 있다. 이 소리들은 음절 종성에서는 못 나오는데 음절 초성에서는 나온다. 편향적이다. 편향적인 분포다. 음운론은 이거 관찰하고 설명하는 거다. 

     

    [t], [p], [k], [l], [ɾ], [d], [b], [ɡ] 이런 것은 실체다. 누가 말하는 걸 들으면 '들을 수 있다.' 녹음기를 들이대면 녹음도 되고 스펙트로그램 관찰도 할 수도 있다.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으로 '관측'💖이라는 게 가능한 것이다. 관측을 한 다음은 일반화를 할 수 있다. 다양한 일반화가 가능하겠지만, 하나만 예를 들자면, 한국어에서 [t], [p], [k], [l]는 단어 처음에 나오고 [ɾ], [d], [b], [ɡ]는 단어 처음에 못나온다. [ɾ], [d], [b], [ɡ]는 모음 사이에서는 나올수 있다. 데이터(자료)를 보고 관측하고 일반화한 것이다. 경험주의 전통에서는 이렇게 관측하고 그걸 바탕으로 일반화하는 것을 최고로 친다.

    더보기

    여담으로, 경험주의 전통에서 관측, 뭐 말이 거창한데,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이 '기네스북' 생각하면 된다. 술집에서 술마시다가 친구들이 싸운다. "야 사람이 어떻게 손톱이 1미터까지 자랄 수 있냐? 적당히 자라다가 안자라겠지" "야 인마, 쌉가능이지. 너 내기할래?"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이후라면 당장에 검색해보겠지만, 만약 옛날옛적이라면 내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내기의 승자는 '관측'💖 기록을 보면 정해진다. 기네스북이 그런 관측들을 기록한 책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내기'를 '논증'이라고 바꾸면 상아탑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점잖은 말처럼 들리는데, 사실 같은 것이다. 내기처럼 논증도 어떻게 관측되느냐가 최종 승자를 결정한다. 물론 손톱길이처럼 아주 심플한 내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음운론 논증은 관측에 노이즈가 많기 때문에 승자가 쉽게 결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식과 체계가 오직 관측으로만 구성되는 건 아니다. 20세기 초반 원자는 관측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는 물리체계의 단위를 구성했다. 원자가 존재한다고 상정할 때 브라운운동, 돌턴의 화학반응 등 관측되는 현상들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암흑물질은 어떠한가? 암흑물질은 여전히 관측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측되는 여러 물리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암흑물질을 상정한다. 20세기 초의 원자, 오늘날의 암흑물질처럼 관측되지 않고, 그래서 실체가 없음에도 설명을 위해 상정하는 것을 '개념'이라고 한다.

     

    음운론에서도 마찬가지다. [t], [p], [k], [l] 를 한 분류(group)로 묶고 [ɾ], [d], [b], [ɡ]를 다른 하나의 분류로 묶는 것도 관측되는 현상(어디 나타날 수 있는지)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아마도 더 근본적인 무언가 요인이 있어서 그게 두 분류를 구분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고 그 '요인'을 [모음간]이라고 이름붙이고 [-모음간] vs. [+모음간]으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p,t,k,l]의 부류는 모음 사이가 아니라 [-모음간] 자질로 설명되고, [ɾ], [d], [b], [ɡ]는 모음 사이에 나타나므로 [+모음간]으로 설명될 것이다. [모음간] 역시 개념이다.

     

    자연과학의 원자나 암흑물질과 달리 이론언어학의 개념은 그 특성상 직접적 관측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걸 달리 말하면, 언어학의 개념은 논증적으로 쌓아올린 것이기 때문에 논증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앞서 상정한 [모음간] 자질은 매우 위태한 논증이다. 따라서 이건 좋은 자질이 아니다. 실제로 통상적으로 상정하는 음운자질 중 [모음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중요한 건 말소리라는 실체이지 분류니 자질이니 음소니 하는 개념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건 실체이고 개념은 쌓아올렸다 무너졌다 하는 것이다.

     

    2. 음운론적 관계

    2.1 데이터에서 말소리의 분포

    말소리는 실체다. 청각과 시각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다. 그런데 말소리는 편향적으로 분포한다. 아래 언어 데이터를 보자.

     

    (1) 어떤 언어의 데이터

      form gloss
    a t ɑ ɾ ɑ k attic
    b p ɑ d ɑ sea
    c k o ɡ i meat
    d l ɑ d i o radio
    e k i l road
    f p o ɡ i options
    g t i l deal
    h k o ɾ i ring

     

    무슨 언어인지 뻔하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 하고 말소리에만 집중하자. 특히 앞서 나온 [t], [p], [k], [l], [ɾ], [d], [b], [ɡ] 에 볼드표시를 해놨으니 이 소리들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말소리가 어떻게 분포하는지와 관련하여 순전히 음성학이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이런 것들이 음운론의 연구 대상이다.

    예를 들어 [t] 소리와 [d] 소리는 둘다 치경음으로 음성학적으로 비슷한데, 나타나는 환경이 다르다. [t]는 (a, g)에서 볼 수 있듯이 오직 단어 처음에서만 볼 수 있고 [d]는 (b, d)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단어 중간에서만 나올 수 있다. 구체적으로 오직 모음 둘 사이에서만 나올 수 있다. 특정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당 소리 그자체의 성격과는 관계가 없이 단어 내 어느 환경에서 나오느냐로 결정된다. 따라서 [t~d] 관계는 음운론적 관계다. 무성음이 어두, 유성음은 어중에 나온다라는 건 환경에 따른 일반화 이지, 어두에 반드시 무성음만 나오란 법은(음성학적 생리적 법은) 없다. 아주 비근한 예로 로망스어들은 어두에 유성음 잘도 나온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등). 한국어도 공명음은 어두에서도 성대가 진동한다.

     

    이와 같은 소리쌍의 관계를 다르게 설명해보자. 시청앞 한복판에 서있다. 게다가 거리응원이라든가 촛불시위라든가 어쨌든 아주 소음이 많은 상황이다. 그래서 [t~d]의 변별이 불가능하다고 치자. 그래도 이 언어에서는 상관이 없다. 내가 치경파열음을 들었는데 [t]를 들었나 [d]를 들었나 헷갈렸다 이거 큰일났네 라는 상황은 이 언어에서 존재할 수 없다. 신호의 변별이 불명확해도 맥락에 따라 정확하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소리의 변별은 정보량이 없다. (정보이론적 설명)

     

    [t~d]쌍 뿐만이 아니다. [l~ɾ]가 그러하고, [p~b]가 그러하며, [k~ɡ]가 그러하다.

     

    이런걸 '상보적 분포'라고 부른다. 한 쌍의 말소리가 있는데, 그 쌍을 구성하는 소리가 상보(서로 '상', 보충할 때 '보')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빨강-청록의 쌍이나 남색-노랑의 쌍 같은 것을 '서로 보충해주는 색이다'하여 '보색'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쓰는 '보'랑 '상보적 분포'할 때 쓰는 '보'랑 같은 개념이다. 보색 관계에 있는 두 색을 동시에 비추면 색이 없어진다. 빨강 있는 곳에 청록을 비추면 색이 없어진다. 그러한 색은 항상 따로따로다. 상보적 분포에 있는 두 말소리도 마찬가지다. 나타나는 환경이 겹치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다. 항상 따로따로여야 한다.

     

    그런데 모든 소리쌍이 다 이런식으로 '상보적 분포'에 있는 것은 아니다. (e, g)를 보면 알 수 있듯이 [k]소리와 [t] 소리는 둘다 무성파열음으로 음성학적으로는 비슷한데, 환경이 겹친다. 두 소리를 혼동하면 의미가 달라진다. 나타나는 환경이 중첩(겹침)이고 두 소리는 변별적이다. (c, f)도 마찬가지다. [k]소리와 [p] 소리는 변별적이기 때문에 이 쌍을 잘 구분하는 것은 이 언어에서 중요하다.[각주:3] 그리고 이렇게 변별적인 소리쌍 하나때문에 의미가 달라지는 단어쌍 (e, g), 그리고 단어쌍 (c, f)는 최소대립쌍 이라고 부른다.

     

    학부생들이 간혹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상보적', '중첩'은 소리의 출현 환경에 대한 서술이고, '변별적' '이음적'(allophonic)소리쌍의 속성이며 '최소대립쌍'오직 두 소리 때문에 맺어지는 단어 간의 관계다.

    1. 환경은 서로 중첩되거나 상보적일 수 있다.

    2. 두 단어가 진공에서 최소대립쌍인 게 아니라, 관심있는 소리쌍이 있고 그 소리쌍만으로 의미 달라지는 단어의 쌍이 최소대립쌍이다.

    그래서 "'각기 - 악기'는 한국어에서 최소대립쌍입니다" 라는 진술은 참이 아니다. 관심있는 소리쌍이 고, 따라서 해당 단어쌍이 최소대립쌍인지 아닌지 평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창의적인 것도 좋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최소대립쌍들이 단순히 같은 위치에 소리가 다른 쌍이 아니라 아주 엄밀하게 동일한 음절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한번쯤은 명심하셨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관측과 일반화를 했으니 여기에 개념 한층을 올리자.

     

    2.2 그 놈의 음소

    상보적 분포에 있는 [t~d], [l~ɾ], [p~b], [k~ɡ] 쌍들은 같은 말이 다르게 소리나는 것들이다. 같은 말? 다르게? 이게 무슨말일까? 식사여부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을 하고 싶다. 실제 언어 표현은 "밥 먹었냐?", "진지 잡수셨나요?", "식사는 아직인가?" 등등 다르게 나온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는 거다. 반면 "밥을 먹었습니다.", "밥을 안 먹었습니다"도 다른 실제 언어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른 말'이다. 심지어 "밥을 먹었습니다" 한 다음 곧이어서 "밥을 안 먹었습니다" 라고 하면 "한 입으로 두 말한다"라고 놀린다.

     

    상보적 분포를 이루는 소리들도 '같은 말 다른 소리'다. 그래서 다를 '이' 자에 소리 '음'자를 써서 '이음'이라고 부른다. 다를 '이' 자는 '이상하다'(평상시와 다르다)나 '이세계'(다른 세계) 등에도 쓰인다. 영어로 이음은 allophones라고 부른다. allo- 역시 '다른'이라는 뜻이다. 두 개 이상의 소리가 쌍이나 군을 구성하기 때문에 복수형이다. 

     

    그런데 이음들은 무슨 말의 다른 소리일까? 여기서 음소라는 추상적 개념이 나온다. 이음은 한 음소의 다른 소리다.

     

    음소 얘기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서울지하철 얘기부터 해보자. 왕십리역 지하철역 승강장에 앉아서 가만 보니, 열차 좌석이 패브릭으로 된 열차도 왔다가고, 열차 좌석이 알루미늄으로 된 열차도 왔다가 가더라. 그런데 다 같은 2호선 열차다. 왕십리 역 안에서 조금 걸어 다른 승강장에 가 앉아서 가만 보니, 마찬가지로 열차 좌석이 패브릭으로 된 열차도 왔다가고 다른 모양의 열차도 왔다가 간다. 그런데 이것들은 5호선 열차다. 2호선, 5호선은 범주명이고 추상이다. 동일한 구간을 운행하는 개별 열차들을, 개별 열차 구분 굳이 할 필요 없을 때 (대부분의 '길찾기' 목적을 위해서는 불필요할테니) 쓰는 개념이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방식이다.

     

    2호선: '패브릭2001호', '알루미늄 2020호'

    5호선: '패브릭5021호', '알루미늄 5030호'

     

    편의상 2호선 열차는 모두 번호가 2xxx라고 했고, 5호선 열차는 번호가 5xxx로 썼다. 실제로 그런진 잘 모른다.

     

    언제나 구체적으로 관찰되는 건 패브릭 좌석 열차 한량, 알루미늄 좌석 열차 한량 등이다. 레이블을 버리면 '패브릭2001호', '알루미늄 2020호', '패브릭5021호', '알루미늄 5030호' 등의 개별 열차가 '관측'되지만, 길찾기 목적을 위해 운용 (이용)할 때 중요한 정보는 오직 2호선, 5호선일 것이요, 운행종료 후 열차 청소하는 목적을 위해 중요한 정보는 패브릭 좌석인지 알루미늄 좌석인지일 것이다. 왕십리역에서 시청역을 가고 싶다. 그럼 2호선인 패브릭 2001호 열차를 타야지 5호선 열차인 패브릭 5021호 타면 안 된다. 그런데 꼭 반드시 2001호 열차만 타야하는 거냐 하면 그건 아니다. 패브릭 2001호를 타든 알루미늄 2020호를 타든 상관이 없다. 즉 패브릭 2001호랑 알루미늄 2020호의 차이는 무의미하고 패브릭 2001호 열차와 패브릭 5021호 열차의 차이는 아주아주 중요하다.

     

    말소리 역시 왕십리역과 마찬가지다. 관찰되는 건 [t]고 [d]다. [k]이고 [ɡ]이다. 그런데 마치 2호선, 5호선 부르듯, [t]와 [d]의 음성적 개별성을 초월한 어떤 '말'이 있고 그 말은 [k~ɡ]와는 다르다. 2001호랑 2020호랑 혼동해도 길찾기에는 문제가 없듯 [t]랑 [d]랑도 혼동해도 특정 기능에서는 문제가 없다. 다만 2001호랑 5021호랑 구분하는 게 길찾기에 아주 중요하듯 [t]와 [k] 사이의 변별도 이 언어에서 아주 중요하다 (데이터의 (e)와 (g)에서 이미 관찰했다). 그래서 마치 패브릭2001호랑 알루미늄 2020호를 추상적으로 '2호선'이라고 부르고 '5호선'과 구분하듯, 개별소리 [t] [d]를 "음소 X의 이음이다"라고 부르고 [k] [ɡ]를 "음소 Y의 이음이다"라고 부르고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같은 걸 세워두는 것이다. 

     

    그리고 음소라는 개념을 세워놓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어에는 음소 X와 음소 Y가 있다"라든지 하는 더 추상적인 이야기도 할 수 있다.

     

    2.3 음운론적 관계들

    이런 것이 바로 음운론적 관계다. 똑같은 얘기 누차 정리한다. 말소리는 각 언어 내에서 분포를 이루는데, 분포가 편향적이다. 각각의 말소리 그 자체를 봤을 때는 (음성학적 분석) 그 편향적 분포를 설명할 수 없지만, 음운론적으로 어떤 말소리가 어디에 나오는지를 '일반화'할 수 있다. 그 일반화를 바탕으로 말소리 쌍 사이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정리는 음운론적이기 때문에 음운론적 관계라고 부른다.

     

    두 말소리는 "어떤 하나의 특정 음소의 두 이음"이거나 "서로 다른 음소에 각각 해당하거나"일 수 있다. 이 두가지가 가장 기초적인 음운론적 관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말소리 그 자체는 음소가 아니라는 것과 음소는 추상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초적이지 않은' 음운론적 관계들도 있다.

     

    우선 출현 환경은 상보적이지만 한 음소의 이음이 아닌 말소리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영어의 [h~ŋ] 쌍이 있다. [h]는 어말에 나올 수 없고 [ŋ]는 어두에 나올 수 없다. 그러나 두 소리가 한 음소의 이음인 것은 아니다.

     

    또한 출현 환경이 중첩되나 이음적인 관계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l~ɭ] 소리의 출현환경은 중첩된다. 두 소리 모두 종성, 특히 어말에서 출현한다. 이런 것을 자유변이라고 한다.[각주:4]

     

    이렇게 음운론적 관계는 무자르듯이 딱 잘리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확률론적 모델링(PPRM, Hall 2009)[각주:5]도 가능하다. 그리고 굳이 어떤 범주에 욱여넣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어짜피 목적은 말소리의 편향적 분포를 설명하는 것인데 만약 개념 도입 안하고 범주화할 필요도 없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굳이??

     

     

    2.4 '음소'를 믿쑵니까

    실제 말소리인 [t], [d]와 구분하기 위해 음소표기에는 /X/를 사용한다. 그런데 // 사이에 어떤 기호를 쓰느냐는 논증의 영역이지 관측의 영역이 아니다. 어떤 주장을 할 것이 아니면 가능한한 기호를 쓰지 않는 게 안전하다. 

     

    예를들어 이 음소를 표기할 때 /X/가 아니라 /t/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우리 모두 (1)이 한국어 데이터라는 것을 아니까...) 한국어에서 모음 사이에 해당 음소가 나타나면 유성음화가 적용된다"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혹은 많은 연구자분들이 받아들이듯 한국어에 유무성 자질이 없다고 상정하고, "유무성 자질이 미명세인 경우 통상적으로 무성형을 기호로 쓰겠다"라는 전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첫째는 강한 주장이고 둘째는 반드시 드러내야 할 전제다. 

     

    혹은 이 음소가 /d/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김미령교수님의 2020년 언어지 논문이 30페이지던데, 여차저차 이런 주장은 저널 논문 30장 분량의 논증일지도 모른다.

     

    요는 이거다. 비록 음소형 표기에 IPA를 쓰지만 그건 말소리를 지칭하는 게 아니고 추상적 개념을 지칭하는 거다. 그냥 이음들 중의 대표형을 세워놓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T/ 이런 중립적인 기호 써도 되고 /ㄷ/ 이라고 써도 된다. 다시 적는다. 음소는 소리 안난다. 들을 수도 없고 소리 낼 수도 없다

     

    수업시간에 매번 하는건데, 구름속에 음소를 지칭하는 기호로 고양이 🐱를 /   / 사이에 그려넣는다. 근데 음운론을 하다보니까 고양이를 칠판에 그릴 일들이 자꾸 생기네. 자꾸 고양이 그리기는 것 힘드니 그냥 그 음소의 관측가능한 형태들 중 하나를 대표로 세워놓자. 마치 2호선 이라고 머릿속에서 운용하되, 실제로 타는 차는 2001호 열차, 2020호 열차인 것처럼.

     

    왜 이걸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느냐 하면, 첫째는 음소가 추상적으로 상정된 개념이기 때문이요, 학생들이 자꾸 /t/를 '기본형', '원래소리' 같은걸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라고 쓸 때는 아무도 "🐱가 [d] 소리로 변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양이랑 IPA기호는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t/라고 처음부터 쓰니 자꾸 "/t/ → [d]는 무성치경파열음이 유성치경파열음으로 변했다라는 뜻이다" 라든가 "/t/ → [t]는 원래 소리가 (아무런 변화없이) 그대로 나온 것이다" 라고 착각하는 것이다.[각주:6]

     

     

     

    추상적 사고가 어려우면 차라리 Bybee나 Pierrehumbert 식으로 {[t], [d]} {[tʰ], [dʰ]} 같은 실제소리 examplar가 둥둥 떠다니는데 그게 특정하게 묶인 상태로 음소를 이해하는 게 건강하겠다. 물론 이 그룹 내 실제 소리 중 하나가 환경에 따라 선택된다. 한국어 레퍼런스 중에서도 배주채(2003)[각주:7] 에 보니, "/ㄱ/ 그자체로는 무성음도 유성음도 아니고 외파음도 불파음도 아니다. /ㄱ/은 이 세 변이음이 모인 집합이다."라는 서술까지 있다.

     

    여담이지만, 아예 Bybee는 '분절' 이라는 개념 자체를 경계하기도 했다. 형태소 정도의 발음이 통째로 저장되어 있는 것이지 형태소가 음소-음소-음소로 분절되는 게 아니라고 보았다. 

     

    어쨌든, 적어도 이런 접근은 특정 하나의 소리가 곧 음소고 그게 다르게 실현되는 게 이음이라는 오개념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커리큘럼 상으로는 exemplar-based로 가르치지는 못한다. 아예 입밖에도 꺼내지 않는다. 다만, 다른 학교에서는 이렇게 음소를 접근하고 가르칠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다. 이 모델링에서도 음소의 실제 소리는 "정해지지 않았음"이다. 환경에 처해져야 하나의 형태로 결정될 테니까. 앞서 말했듯, 음소는 개념이고 일정 요건을 갖춘다면 설명력이 동일한 개념들 사이에 위계는 없다.

     

     

    3. '음소형 무성치경파열음이 그대로 발음' 따위가 아니다

    이 섹션은 말소리의 음운론적 관계 그자체와는 관련 적은, 특정 음소를 형식적으로 정의하는 문제에 대한 부분. 

    3.1 전제하는 전통. 이번에도 서론이 길다

    이 블로그의 대부분의 글들이 그렇지만, 여기서도 음성학과 음운부의 엄밀한 경계를 상정하는 '이론음운론' 전통을 따른다. (특히 사용기반 인지주의에 상반되는 맥락에서 구조주의/형식주의 라고 부를수도 있을 것이다) 음소가 실재하고, 자질로 구성되며, 이것은 모두 시스템 내의 변별에 기반한다는 종교적 믿음(ㅋㅋㅋㅋ) 이다. 물론 '종교적 믿음'이라는 표현은 사용기반이나 인지언어학 진영에서 우리 쪽에게 할법한 비난이고 우리끼리는 이걸 종교적이라고 생각할 리가 없음.ㅋㅋㅋㅋ

     

    구조주의/형식주의라고 적으면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전통은 대충 스케치하자면 이렇다. Trubetzkoy와 Jokobson으로 대표되는 1930-1940년대 Prague학파와 Bloomfield의 미국구조주의, 그리고 1960년대 Halle/Chomsky의 SPE 이후 소위 '생성문법' 캠프 내에서의 음운론, 그리고 1980-90년대 이후 생성문법의 강점기 (ㅋㅋㅋㅋ)에서 광복을 맞이하고(ㅋㅋㅋㅋ) Archangeli/Pulleyblank의 Grounded phonology, Hayes의 Phonetically-based phonology 그리고 현대에 진행중인 Mielke, Hall, Blevins 등의 창출적(Emergent) 구조까지를 말한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변별,' '추상적,' '형식적 단위'가 키워드다.

     

    옛날옛적 한옛날의 소쉬르부터, 어떤 시스템 내에서 단위 X와 Y가 의미있는 것은 X나 Y 각 개체적 속성(음소 이야기로 치자면, 어떻게 발음되나 소리가 어떻게 나나 등등)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 내에서 변별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쉬르가 바둑알 비유를 했었던가 체스말 비유를 했었던가 부끄럽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나가는길에 ChatGPT한테 물어봐라. 이런건 이제 ChatGPT가 알려줄 때도 됐다. 대충 판은 시스템이고 말은 단위인데 판위에서 말은 서로의 거리였던가 로 인해 의미있다고 비유했던 것 같은데, 정말로, ChatGPT가 말해줄 것이다.)

     

    그 위에 더해서 Prague학파는 추상적인 '자질'이라는 단위를 도입했다. 단순히 "[p, pʰ, k, kʰ]는 한국어에서 서로 의미차이를 유발하기에 서로 다른 음소들의 실현이다"라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spread glottis] [-spread glottis] 와 같은 자질을 동원하여 이 자질이 [p]와 [pʰ], [k] 와 [kʰ] 사이의 차이를 설명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spread glottis]라는 자질은 쓰지 않았다. [spread glottis]는 현대적 자질이다. 중요한 것은 변별되어야 음소였듯, 변별되는 효과를 유발해야 자질이라는 것이다.

     

    Prague학파까지의 '변별'에 대한 이해는 추상적이고 심리적이었기에, 자질도 심리적이고 추상적이었다. Bloomfield는 현실(?)로 내려와서 자질을 다소 구체적으로 이해했고 이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져 '변별'이라고 할 때 단순히 심리적이고 뜬구름 잡는 변별이 아니라 음성학이나 물리적 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관측'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음소를 자질의 합으로 이해하는 건 여전하다. SPE는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다소 순진(?)하게도 인간의 내재적 언어능력을 아주 엄청난 걸로 봤는지 엄청나게 큰 자질 인벤토리를 모든 언어에 대해 상정했다. 그게 언어습득과정에서 activate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점차 현대로 오면서 UG에 대한 환상도 다소 깨지고 (ㅋㅋㅋ) 인지주의나 사용기반 진영의 공격도 받으면서, 언어데이터를 통해 꼭 필요한 소규모의 자질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질의 구체성' 정도로 용어를 만들 수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건 언어습득(acquisition)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시스템에 어떤 자질이 존재하느냐, 그리고 그 자질들이 어떻게 값이 매겨지느냐 등은 음성학적/물리적 자료에 나타나는 변별을 일반화하고 패턴화했을 때 결정되는 것이지 UG에 이미 자질목록이 내장되어 있고 그런것은 다소 망상적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전히 중요한 것은 시스템 내에서의 변별이다. 이것을 정밀화하는 과정이 오늘날까지다. 자질들 사이의 위계적 구조를 밝혀낸 발견이 1995년 이었고 (Feature geometry), 이제는 자질이 창출적(emergent)으로 결정된다고 이해하고, 무한하게 창출되지 않게 하는 인지적인 제약 같은게 뭐 있나. 뭐 얼추 이렇게 이해가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눈치 챘는가 모르겠는데, 이 전통에서는 점점 '음소'자체에 대해 초점을 안 맞춘다. 실제로 관측 가능한 말소리, 그리고 그걸 분석하는 원자적 단위로서의 자질이 중요할 뿐이다. 음소는 여전히 자질의 집합으로 이해된다. 이음 중 기본적인 말소리 이따위가 아니라. 

     

    음운론 역사 겉핥기 한김에 말하자면, 학교에서 형식주의 음운론 이론사로 세미나 과목이 열린 적도 있었다. 음소론(자질론)이 초점은 아니었고 음운과정 모델링이 초점이었는데 1930년대 Prague학파부터 현대 MaxEnt에 이르기까지, 동화니 이화니 조화니 하는 음운현상의 '이론적 형식화'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이루어졌나 개괄하는 과목이었다. 그때는 따라가기 벅차고 재미가 없었는데 과정생으로서 안 바쁠 때 한번은 듣기에 참 좋은 과목이었다 하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블로그에 그 내용을 정리해보는 것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공약하는거다ㅋㅋ)

     

    3.2 다시 치경음

    다시 한국어 데이터 (1)에서의 [t~d]를 생각해보자. 어떨땐 [t], 다를땐 [d]다. 이 말소리들은 어떠한 음소 X가 음성적으로 발현된 현실형/실현형이다. 이때,

     

    (틀린소리 예고) 이건 틀린소리다 → 이 음소는 /t/이고 그게 어두에서는 순결하게 오롯이 아주그냥 변함없이 원래형태 그대로 [t]로 발음된다. (X)

     

    기호는 /t/라고 쓴다 치자. 그런데 그렇다고 이 음소가 [-voice,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 로 정의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테다.

     

    음소는 자질총이다. 알파벳이건 IPA건 기호를 쓰지만 그건 일련의 자질들을 '바로가기'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링크 같은거다. "/t/라고 쓰지만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를 지시한다" 정도다. 그러나 진짜 말그대로 [t]가 무성/치경/파열음 이므로 [-voice,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 이렇게 음소형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음운자질은 매우 경제적으로 사용된다. 음소부터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허상'인데, 음운자질은 더더욱 그러하고 오직 관측을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만을 상정하여야 한다. 어떤 음운자질이 음소 정의에 사용된다는 건, 그 음운자질의 값설정(binary feature의 경우)이나 유무(privative feature의 경우)가 음소적 차이를 야기해야 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쉽게 말하자면, 한국어에 양가적(binary) 음운자질 [voice]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면, 모든 것이 똑같고 [+voice], [-voice]만 다른 것이 한국어에서 의미가 있음을 보여야 한다. 

     

    다시 [t~d]. [t~d]로 실현될 음소 X가 [-voice,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 라고 하자. 그렇다면 [+voice,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는 어떤 음소인가? [voice]라는 새로운 자질을 꺼내려면, 그게 음소 인벤토리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X = [-voice,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의 잠정적 거울 음소 [+voice,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는 X와 맞짱붙으면 최소대립쌍이 나오기라고 하나?ㅋㅋㅋ [-voice] 상정 (아니 같은 측면에서 [+voice] 상정도)은 지지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voice] 자질의 상황은, 이미 언급된 다른 자질들, 즉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 와는 상황이 다르다.

     

    [CORONAL]은 privative feature이므로 있었다 없었다 하는 자질이다. 심지어 Feature Geometry에 따라 [+ant]의 운명(?)도 같이 결정된다. [CORONAL]이 '나 없어져볼게 얍' 하는 순간 한국어에는 어떤, [t~d~n~tɕ~dʑ~h]로 실현될 음소(즉, 러프하게 말해서 명시적으로 [LABIAL], [DORSAL] 명세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소리들이 다 이음으로 있는 어떤 음소)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게된다. [CORONAL]이 음소 인벤토리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 이러한 유사-한국어는 하와이어 같으려나? 하와이어는 [t~k]가 한 음소의 실현형이다. 그런데 진짜 한국어에는 이런 음소가 없고 심지어 [tɕ~dʑ]는 다른 음소의 이음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CORONAL]은 음소적 정보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자질이다. [+anterior]는 정당화되는가? [CORONAL, -anterior, -continuant,-sonorant]로 명세값을 바꾸면 다른 음소를 지시한다. 뭐 얼추 [tɕ~dʑ]로 실현되겠네.[각주:8] [-cont]도 같은 논리로 정당화된다. 모든 게 동일할 때 [-cont]와 [+cont]의 차이는 한글 표기상 ㄷ과 ㅅ에 해당하는 두 음소를 변별한다. 마지막으로 [-sonorant]. 이 자질의 값을 바꾸면 한글 표기상 흔히 ㄷ과 ㄴ로 표기되는 두 음소를 변별한다.

     

    즉, 데이터 (1)에서 이음 [t~d]의 음소형은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로 정의하는 게 가장 타당하다. 다만 문제는 이것은 그자체로 발음될 수 없고 딱 이렇게만 명세되는 IPA 기호도 당연히 없다. 음운론이 불친절하게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 이렇게 딱 음성학한테 던져준다면 [t]라는거야 [d]라는거야 할 것이다. 의사가 처방전에 "이사람 마시는 약 주시오."하면 약사가 벙찌지 않을까? 

     

    그래도 기저형이니 음소니 하는 영역의 음운론을 하는 데에는 소리내기 위한 자질 전체가 다 지정되어 있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뭐 대충 단축키로 /T/ (추상적인 어떤 치경파열음)로 적고, 가장 먼저 언급될 때 /T/ = [CORONAL, +anterior,-continuant,-sonorant] 정도로 정의하면 될일 아닌가?

     

    그리고 이 /T/는 환경에 따라 다른 후두자질 [voice]의 값을 부여받는다. 두 공명음 사이에서는 공명음 발음 시의 성대진동이 그냥 끊기지 않아서 '발음이 편하게' [+voice]가 지속된다. 통사론자들이 농담으로 "야 음운론 너네 시험지 답쓸 때 모르겠으면 '발음이 편해진다' 쓰면 80점맞고 통과한다며 ㅋㅋ" 하고 놀리는데, 말그대로 그런상황임. 🤣

     

    쉽게쉽게 이야기하자면 음소수준에서 [voice] 자질이 없고 값도 없기 때문에 음성부가 성대진동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해도 음운부는 딱히 저항(?) 없이 음성부가 시키는대로 간다. 다시 어렵게 이야기하자면, 고전 autosegmental / feature geometry에서는 delinking없는 feature spreading으로 형식화하고 요즘 OT에서는 Aɢʀᴇᴇ (Voice) 자질 정도로 형식화한다. 음운동화(assimilation)를 설명할 때와 같은 설명기제다.

     

    그런데 공명음 사이가 아닌 경우 (어말이나 단어처음 등)는 딱히 성대진동여부를 결정해줄 이웃이 없다. 음운부가 강력하게 '성대를 진동시켜라' 혹은 '성대를 절대 진동시키지 말아라'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음성부 입장에서도 딱히 성대를 진동시켜야 할, 진동시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성대를 진동시키든 진동시키지 않든 의미변별이나 언어 작동 자체에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의사-약사의 비유를 이어가자면 처방전에 "이사람 마시는 약 주시오"라고 적혀있으면 그걸 받은 약사가 환자의 상태 등 맥락을 본 다음 "아 감기걸렸는데 알약을 못먹는 사람이니 마시는 걸로 줘야하겠군" 하고 생각하여 구체적인 약을 발부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약학을 몰라서 실제로 약사들이 어떻게 약을 주는지 모름.) 

     

    어두나 어말에서 성대진동하면 좀 외국어 화자 느낌은 나겠지만 그건 언어외적인 문제다.

     

    혹은 이럴수도 있다. 어말에서는 아마도 음성부가 '모든 시스템 shutdown' 같은 명령을 할 것이고 그건 성대진동도 해당될테니 유성음[d]로 실현되는 게 아주 어색할 테지만, 어두에서는 덜 문제될지도??? 정말로 그런지는 간단하게 praat 실험도 돌릴 수 있을 듯하다. 다시말해서 만지고 관측하고 할 수 있는 문제 이므로 이미 음소 논의의 영역을 벗어난 상태인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엔 아마도 높은 확률로 음성부는 게을러서 "딱히 음운부에서 시키지 않으면 굳이 성대진동 하지말자" 이럴 지 모른다. 음성학 욕하는 게 아니라, 최소노력 최대효과의 원칙 아니겠는가?ㅋㅋㅋ 음성적으로 기본값이 목구멍 벌려 성대진동 안하는 거고 특별한 경우에만 성대를 진동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아니 이사람은 왜 갑자기 발을 빼고 애매해지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 라는 느낌이냐?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바로 그 생각이 든 지점이 음성학과 음운론의 경계선일 것이다.ㅋㅋㅋ) 

     

    평음-격음이 VOT만으로 구분되던 시절?

    한국어에서는 달/딸/탈 이 구분되는데, 이때 음소 ㄷ/ㄸ/ㅌ가 후두에 있는 조음기관을 어떻게 조작하느냐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자음이 입과 코의 수준에서 결정된다는 점에서 이건 특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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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행히도 음운자질과 음운규칙은 수강취소기간 이후에 배치되어 있으므로 어려워도 울며 겨자먹기로 버티는 듯하다. [본문으로]
    2. '불파된다'라고 하는데 IPA 기호로는 [p̚, t̚, k̚] 처럼 ̚ 기호를 덧붙여 표현한다. [본문으로]
    3. 한국어를 배우는 영어권 화자들이 평음과 경음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영어에서 변별적이지 않던 소리쌍이 한국어에서는 변별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별성은 개별언어에 귀속되는 속성이다. [본문으로]
    4. 여담으로 영어의 [ɛ]conomy, [ɪ]conomy를 자유변이의 예로 드는 학생도 있었다. 물론 자유변이가 맞지만, 어휘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생산성이 없기 때문에 예외적 사례로 처리하는 게 타당한 듯하다. 개별적인 사례가 아닌 말소리의 관계 그 자체가 포커스라는 점! 차라리 제1음절 [ɪ ~ aɪ] 변이가 더 생산성 있는 듯하다. Iraq, director, either 등등. [본문으로]
    5. Hall, Kathleen Currie. 2009. A probabilistic model of phonological relationships from contrast to allophony. Dissertation. OSU. [본문으로]
    6. 물론 기저 음소형 완전명시의 시대가 없었던 건 아니다. SPE 식의 논증이 그랬다. 말하자면 이렇다. "모든언어가 동일한 자질목록을 공유하고 각 음소별로 이미 자질값이 완전 명시된 형태로 존재한다. 한국어는 음소수준에서부터 무성음에다가 조음위치 기류방향 기류근원 다 정해져있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SPE로부터는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세계 언어에 대한 이해가 발전했다. 미명세가 상식이고 미명세된 음소는 실제로 말로 나올 때 음성부에서 기본값이라도 붙여주지 않으면 소리가 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한국어 음소 /t/ 같은 표기가 더 misleading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여담이지만, 이런식으로 IPA기호 빌려 개별 음소 적는 것도 한 두주 뿐이지, 일단 음운작용 진도로 들어간 이후 부터는 단일음소가 아닌 자연부류로 초점이 옮겨진다. 무조건 자질군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7. 배주채. (2003). 한국어의 발음. 삼경문화사 [본문으로]
    8. 비근하게 '다리-자리'가 [anterior] 값에 따른 최소대립쌍이겠다. 모든 게 다 같을 때, [anterior]의 값이 [+ant]이면 '다리', [-ant]이만 '자리'이다. 영화관에서 "여기 자리있어요?" 안하고 "여기 다리있어요?" 하면 이상한 사람이다. [anterior]는 이처럼 한국어에서 아주 중요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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