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곧 저널 Language에 실리게 될 Law, Power & Quinto-Pozos 논문 manuscript가 돌고있다 (이하 LPQ). 우리 리딩그룹에서도 circulate되어서 덕분에 나도 구해서 같이 읽었다. 리딩그룹에서 (여러의미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아마 많은 음운론/역사언어학 연구자들 그룹에서도 그랬을 것같다.
LPQ는 음운론, 특히 통시언어학(혹은 미시적으로는 음운변화 비교연구)에서 수어가 온전한 위치를 차지하고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수어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환기시킨다. 수어에서도 입말과 유사한 음운변화의 원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언어변화 데이터에서 수어가 고려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건 잘못되었다. 수어도 언어다. 이런 요지.
나머지 부분에선 리딩그룹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적절히 내 단상을 섞어 메모한다.
목차
1. 논문에서 데이터의 부재
Language에 간혹 실리는, 연구자사회의 계몽(?)을 요구하는 글들이 그렇듯, 큰 주장에 빈약한 근거들이 이어졌다. 리딩그룹은 어떤면에서 저자 없는 자리에서 논문 뒷담화하는 자리인데(ㅋㅋㅋㅋ) 그래서 이 빈약한 근거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논문 저자들이 본인들 논문에서 구체적 데이터를 제시했음에도 그걸 인용하지 않았다. 이건 사실 왜 그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음.
이건 아마도 우리들이 모두 data-driven approach에 근간을 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장은 뭐든지 할 수 있다. UG가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신이 언어를 창조해서 선물해줬다고 할 수도 있고, 언어가 창발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주장은 중요하지 않다. 데이터가 중요하다. 그런데 LPQ가 데이터를 논하지 않는다. 이건 모두가 동의하는 문제다.
2. A언어와 B언어
그러나 모두 똑같은 이야기만 한 건 아니었음. (그럴거면 리딩그룹을 할 이유가 없음)
입말 언어를 표준으로 놓고 "수어도 [....]" 라는 틀을 전제하고 그 틀의 빈칸을 채우기 하는 건 잘못된 관행이다. 그런데 수어의 동등한 위치를 주장하는 LPQ 자신들 역시 그 잘못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건 문제다. 이런 말이 수어 음운론 연구자에게서 나왔다.
다른 음운론 연구자는 그 구도 자체가 무엇이 문제냐는 요지로 이야기했다. 표준이론이라는 틀은 이념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고 다만 '불완전'할 뿐이고, LPQ가 요청하는 것, 그리고 연구자 커뮤니티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이론은 도전에 열려 있어야 한다" 라는 것.
사실 언어학의 발전 자체가 깨지고 변화하는 정반합의 과정이었다. 우리가 언어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언어에 대해 theorizing하는 것들이 뿌리가 서유럽 언어만을 중심으로 했고, 그 이후에는 제국주의 과정에서 접한 원주민 언어들을 통해 이 표준이론이 깨졌고, 그리고 학계에 전반적으로 불어닥친 '개방적 리버럴리즘'의 흐름 속에 언어학은 채록-일반화-이론화-예측을 최대한 많은 언어에 대해 반복하는 연구 프로그램을 구성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A가 표준 그리고 B도 [....]"라는 틀이 전제된다면, 반대로 "A가 표준인줄 알았는데 B를 보니 틀렸다"도 동시에 전제된다. 그리고 A와 B는 한때 "A:유럽언어 B:신대륙언어" 였다가 "A: 알려진언어 B: understudied languages" 였다가 이제는 "A: 입말 B: 수어"일 뿐인 것이다. 수어는 이 구도에서 B언어의 지위에조차 오지 못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게 LPQ의 주장이다.
3. 수어 (어떻게) 전사할 것인가?
언어변화를 추적하려면 "어떤" 변화가 유의미한지를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contrastiveness다. 따라서 수어는 우선 전사체계를 명확하게 표준화해야 하고 그 체계로 기록되어야지 비로소 언어변화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지금 필드의 문제는 수어를 위한 표준 전사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음성학 연구자는 질색팔색. 그거 아니라고. (옆에 있던 음운론 연구자가 pen-and-paper linguistics 하지말란 얘기군 이라고 거들었다) 그 음성학 연구자는 덧붙였다.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기록해야 하고, 표준 전사의 시스템은 1'임의적' 허상이라고. 지금 음운론자들이 '상정'할 그 수어 자질들은 시간이 지나서 보았을 때 불완전할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구분없이 가능한한 많은 정보를 차별없이 기록해야 한다. 전사는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
다시 되돌아와서, 그럼 어느정도가 많은 정보냐고. 모든 수어의 실현상들을 다 녹화라도 할거냐고. 그렇게 녹화를 다 하면 맥락을 잃었을 때 어떤게 유의미하고 어떤게 노이즈인지 어떻게 알 거냐고 (이건 전형적인 음운론-음성학 논쟁을 닮았다) 더 나아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아직 수어용 praat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이 어떤 구성을 갖추어야 하는지에도 이론이 많다. 입말 언어학에서 praat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수량적 데이터를 본격적으로 공유하게 된 게 불과 20년도 안 된다. 그 전까지는 연구와 기록과 소통을 위한 pen and paper가 필수였다. IPA가 비록 시궁창 취급을 받지만, 여전히 우리가 IPA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편리성 때문이다. 분석과 사고의 틀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이론이 가능하다. 2
4. 수어 변화 데이터는 왜 양적으로 적을까?
근데 왜 수어 변화 데이터는 양적으로 적은걸까? 수어의 통시언어학 논문들을 보면 대체로 창발에 관한 것들이다. 커뮤니티의 필요에 따라 그자리에서 만들어지는 creole 같이 묘사되는 논문들이 많다. 하나의 fully functional한 수어가 세대를 거쳐가며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걸 본격적으로 연구한 건 그닥 흔치 않다. 말그대로 LPQ 이 세사람이 유일무이.
아마도 하나의 이유는 데이터 양 자체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난 고등학교때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봉사했는데, 수어가 아닌 구화를 가르치는 학교였다. 공공연하지는 않았지만 수어를 사용하면 패널티를 받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수어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수어 사용 부모도 자식은 구화를 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세대를 건너 수어가 전해지는 사례 자체가 흔치 않았다.
(다시 전사의 문제로 돌아오는데) 표준적인 기록체계의 부재 역시 수어 변화 데이터 부재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입말의 변화에 대해 아는 거의 모든 것들은 펜과 종이위에 기록된 것들이다.(이때쯤 음성학 연구자들은 합죽이가 되었다. 펜과 종이가 미래에 연구될 언어변화 데이터를 만들어낸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뒤지고 또 뒤지다보면 데이터가 있긴 하더라.
아래 수어는 프랑스 수어(LSF – Langues de Signes Français) 19세기 형태에서 발견되는 CHAQUE다. 엄지손가락을 든 primary hand를 좌우로 움직이며 몸 바깥쪽으로 엄지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형태다.
ASL(American Sign Language)에서 이 수어를 차용했다. 아래 형태는 1910년 사전에 나오는 ANY다.
LSF CHAQUE와 ASL1910 ANY 사이에서는 handshape과 movement가 동일하고 다만 차용과정에서 다소 단순화되었다. LSF CHAQUE에서처럼 왔다갔다 하는 게 아니라 한번만 쓰윽 손목을 돌리며 이동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Gen Z가 쓰는 ASL의 ANY. 이제는 원형태도 못찾을 정도로 한번 엄지손가락 손을 까딱하는 형태가 되었다.
Movement feature가 갈수록 단순화되는 언어변화의 과정이 ✨관측 ✨ 되었다.
나는 제1언어가 입말이어서 그런지 아래의 밈이 생각난다.
https://youtube.com/shorts/eJ3REPPl0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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