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음성음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Peter Ladefoged를 알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Ladefoged가 책에서 음성기호를 잘못(?) 쓴 예시를 소개합니다. 음성학 발전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기호를 얼마나 신뢰해야 하는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다루는 것이 목표입니다.
목차
1. Ladefoged의 실수?
Ladefoged는 현대적 의미의 음성학의 기초를 마련한 훌륭한 선생님들 중 한 분이십니다. 1960년대에 UCLA에 phonetics labratory를 창립했는데, 이 랩 출신의 훌륭한 음성학자들이 많으십니다. 또한 Ladefoged가 쓴 (그리고 사후 Keith Johnson이 이어서 개정판을 내고 있는) 음성학 교과서 A Course in Phonetics는 지금도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음성학의 마수에 걸려들게 매력에 심취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Ladefoged (1968) "A phonetic study of west African languages"를 보다보면 아리송한 부분이 있습니다. Igbo에서 모음이 Advanced Tongue Root 줄여서 ATR 자질로 변별된다는 요지로 아래의 도표가 있습니다. 38페이지입니다.
네 개의 sagittal section이 있는데 각 도표는 [ATR] 만으로 변별되는 모음 최소대립쌍입니다. 실선으로 표시된 것은 [+ATR] 즉 혀뿌리를 긴장시켜 앞으로 배치시켜 조음되는 모음이고, 점선은 [−ATR], 즉 혀뿌리를 긴장시키지 않은 채 조음되는 모음입니다. 한 도표에 나오는 두 모음은 모든 게 다 똑같은데, 혀뿌리를 긴장시키느냐의 여부만 다른 모음입니다.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하셨나요? 좌측 상단입니다. 잘 안 보이신다면 확대해보겠습니다.
[i]는 전설고모음(high front vowel)이고 [e]는 전설중모음(mid front vowel) 입니다. 모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두 모음이 ATR만으로 변별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혀높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Igbo의 철자체계를 보면 위 도표에 [e]에 해당하는 철자는 ị 입니다.
i 에서 혀뿌리를 안 긴장시킨 것이니 문자 아래에 점을 찍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u에서 혀뿌리 안 긴장시킨 모음은 점 찍은 ụ이고, o 에서 혀뿌리 안 긴장시키면 점 찍어 ọ로 씁니다.
심지어 [e] 소리는 Igbo에서 다른 모음의 음가로 쓰입니다. 아래의 모음 삼각도를 보면 [e]가 따로 있고, Ladefoged 표에서 [e]로 적힌 건 현재는 [i̙]로 씁니다. 모음 아래에 있는 ㅏ 모양의 기호는 Retracted Tongue Root를 표기하는 기호입니다.
따라서 분명 i-e 구분 도표에서 나온 [e] 기호는 잘못 쓴 기호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Peter Ladefoged는 모음 발음이 IPA 공식홈페이지에서 제공될 정도로, 각 기호가 어떤 모음에 대응되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Peter Ladefoged더라도 논리적 모순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요? 혹은 Igbo 모음은 아무 심오해서 훌륭한 음성학자라더라도 변별하는 데 한계가 있는 걸까요?
아니라면 그냥 오타가 수십년 째 고쳐지지 않은 걸까요?ㅋㅋㅋ
2. Cardinal vowels 그리고 도제식의 음성학
Ladefoged가 실수한 것도 아니고 Igbo 모음이 비화자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오타도 아닙니다)
"[i]와 [e]가 혀뿌리 긴장 정도만으로 변별된다" 라는 이해하기 힘든 진술문은 사실 Cardinal vowel theory를 생각하면 납득이 됩니다.
Cardinal vowel theory는 19세기에 벨 등이 정립한 표준모음(cardinal vowel)을 기초로 20세기 초에 Daniel Jones가 정립한 모음의 나열법입니다. 오늘날 사용된 IPA 기호체계 모음 차트의 아버지 격 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음성학자 / 음성공학자들은 다양한 언어에서 나타나는 모음을 3개 차원으로 나누어 표준모음을 선정했습니다. 1 이 3개의 차원은 혀의 높이(고모음-저모음)에 따라 4단계, 혀의 앞뒤(전설모음-후설모음)에 따라 3단계, 그리고 원순/비원순 이렇게 3개입니다. 2
20세기 초에 모음을 구별하고 각각에 기호를 부여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IPA에서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그러나 정말 놀라운 건 각 모음의 조음법과 소리의 양상(어떻게 들리는지)을 도제식으로 전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음성학 공부하는 것 중 일부는 이 모음을 직접 듣고 구별하는 것과, 각 '기본모음'을 조음하는 정확한 혀위치를 훈련하는 것이었던 셈입니다.
Peter Ladefoged는 이 Cardinal vowel theory에 따라 훈련받은 음성학자였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논문이나 책 등에 이런 표준모음을 써 놓으면, 훈련받은 음성학자들은 그걸 머리속에서 재생(?)할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연히 상상하는 음성학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유튜브를 통해 혹은 각종 온라인 레퍼런스를 통해 모음의 실제 소리를 언제든 원하는대로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CD나 테이프 등의 물리적 매체로 소리를 재생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기호를 사용하되, 그 기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걸 물리적 소리로 변환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3
어쨌든 Ladefoged 입장에서는 울며겨자먹기로 [e] 라는 기호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자신이 들은 모음이 [i̙] 였는데, [i̙] 를 [i̙] 라고 하지 못하고, 기본모음 목록 상에 있는 것 중에 그나마 가까운 [e]를 쓴 것입니다.
즉, "내가 듣건대..."라는 음성학자의 권위가 인정되었고, 이는 대체로 기술적 한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3. 패러다임의 변화 그럼 이제는?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죠. (너무 오래전에 달라져서 '이제' 라는 말을 쓰기도 민망합니다.ㅋㅋㅋ) Ladefoged 본인부터가 Cardinal vowel theory에 다소 회의적이었고, 표준모음에 기반한 커리큘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Ladefoged의 다른 책 Vowels and Consonants에 보면 cardinal vowel theory에 의존하던 이전의 음성학을 갈릴레오 이전의 천문학(Pre-Galilean astronomy) 에 비유합니다. 갈릴레오 이전에도 하늘을 관측하고 기록하고 연구하던 천문학자들이 있었지만, 측정장비를 표준화하고 엄밀한 관측을 하는 전통은 갈릴레오가 처음 시작하였습니다. 음성학도 그러합니다. 현대음성학의 엄밀성은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음성파일을 저장하는 매체의 가격이 저렴해지고, 심지어 익숙지 않은 언어더라도 조금만 검색하면 인터넷을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죠. 심지어 Praat 등 무료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누구나 말소리를 분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모음을 "근사값" 기호로 표시하는 건 이제는 음성학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IPA 기호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그냥 '단축키' 같은 것이고, 누구도 기호 그 자체를 백퍼센트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IPA 기호와 표준모음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음운론자에게 있어서, 기호는 선호의 영역이지 절대선/절대악의 영역이 아닙니다. 음운론은 음운 자질의 운용을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촘스키가 Sound Patterns of English에서 말한 것처럼 '음소기호는 자질총에 대한 단축키 이상의 의미가 없다. /p/, /t/, /k/라고 쓰든, 1,2,3 이라고 쓰든 본질은 똑같다' 이것도 너무 극단적인 경우지만, 음운론적 논증 그 자체에 있어서는 기호의 중요성이 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비음(nasal sounds)에 대해 어떤 논증을 하는데, 그것과는 관계가 적은 ㅈ의 음가를 [c]로 전사하든 [tɕ]로 전사하든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특히 실제 소리 [t] 와 추상적 소리 /t/를 아예 구별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음성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호를 맹신하는 음성학자는 드뭅니다. 기술하는 대상의 물리적 말소리 (혹은 의도된 말소리)에 가까운 IPA 기호를 선정해서 쓰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말소리의 물리적 실체로부터 다양한 측정치들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면, 그 측정치 자체를 공유합니다. 특히 음성학의 연구대상인 말소리는 범주적이지 않고 스펙트럼을 이루기 때문에, 아무리 세세히 나누더라도 범주적일 수밖에 없는 기호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기술의 발달로 범주적 기호체계에 모음 스펙트럼을 욱여넣을 필요가 없는 셈이죠. 심지어 이제는 아래와 같이 아주 간단한 툴을 통해서도 비범주적인 애매한 위치의 모음을 쉽게 '조음'할 수 있습니다.
(Pink Trombone이라는 툴인데 사용법 설명 영상은 여기있습니다. 소리를 어떻게 끄는지 모르겠으면 우측하단에 있는 [always voice]를 클릭하면 됩니다)
모든 모음이 스펙트럼 상 '애매한' 지점에 존재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Geoff Lindsey의 영상을 공유합니다. 이 영상에서 Lindsey는 말소리를 마치 색깔에 비유합니다.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4
4. 여담과 결론
학부생들을 상대하다보면, 기호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개론이나 음운론 수업에서 음성학 부분을 나갈 때는 지적을 하지 않지만 (저 자신이 음성학자가 아니라서 음성학 과목은 해본적 없음), 음운론 진도에서는 기호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단축키' 비유를 들곤 합니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비유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사람마다 모음 조음양상이 다르고, 어떤 모음은 기호의 차이를 유발할 정도로 다른데 (맞습니다. 한국어의 'ㅡ' 모음 얘기에요 [링크1] [링크2]) 기호에 집착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지에 대한 고민도 있습니다. 물론, 음운론자들이 유독 예민하게 '엄밀한 기호 사용' 고집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뭐... S-side (통사의미론) 사람들에 비해 확실히 음성음운론자들이 기호에 예민한 건 사실이니까요.ㅋㅋㅋ
또 하나의 (음운론적) 교훈은 기호와 자질 간의 매칭을 당연히 전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논문이나 책을 읽을 때, 어떤 기호가 나왔다고 해가지고, 어떠한 자질값을 상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논문의 저자가 "나 IPA 시스템 사용했어!" 라고 명시적으로 적어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질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려면 반드시 패턴을 통해 말애햐 할 것입니다. 여러 최소대립쌍에서 체계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에야 그것을 어떤 자질 [F]의 운용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기호 하나만 독립적으로 놓고서 이러저러한 자질을 상정한다면, 가설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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