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아는 만큼 보이는 건지, 관심이 생길 때가 되어서 더 보이는 건지, 이번학기에는 강의자가 어떻게 학부 수업을 '운영'하는지를 주의깊게 보게됩니다.
여태까지는 강의를 어떻게 하는지, 학생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는지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bts (behind the scenes)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에 관심이 생기네요. 특히 학생들이 과제를 위한 과제가 아니라 정말 음운론을 공부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머리속에 새기는 중입니다.
과제를 내는 건 학생들이 직접 음운론을 해볼 수 있게 유도하는 목적을 가집니다. 데이터를 보고 그걸 음운론적으로 사고하고 논증하는 과정을 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기한 내에 제출을 하는 것이나, 교과서나 수업자료 범위 내에서 아주 조심조심하는 '착한' 답변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건 부차적입니다.
음운론은 (그리고 아마도 모든 과학은) 데이터에 입각한 가설을 세우고 본인의 그 가설을 창의적으로 논증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리스크를 지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2학년 학부생 때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리스크를 져야지 그것에 대한 코멘트를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교과서와 수업자료에 나오는 것을 잘 베껴쓸 수 있니?" 는 정말 정말 무의미합니다. 심지어 제출기한 땡치면 곧바로 채점을 시작하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 늦었으니 감점 이딴 건 정말 소인배같은(?) '평가를 위한 평가'일 따름입니다.
'과제를 위한 과제'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전술이 있는 것 같아서 정리합니다.
- soft due dates
- A (or A+) is reserved
- drop the lowest

목차
1. soft due dates
제출일을 정하되, 제출일을 지났다고 칼같이 감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어떤 교수님은 제출일을 정하되 정답지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제출을 받아주고 정답지가 공개된 후에는 제출을 안 받아준다. 제출받은 과제들이라면 늦게 냈다고 감점하는 경우가 없다. 문제는 정답지가 언제 공개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학생 입장에서는 제출일 전에 딱 제출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미룬다면 리스크를 지는 것이다. 나는 20대 초는 리스크 잘 지는 법(책임질 수 있을만큼 리스크 지기)을 배우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policy를 매우 좋아한다.
이번에 내가 조교 들어가는 교수님도, 제출일을 목요일로 정하되 감점은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자정부터다. 목요일을 목표로 과제를 하고 제출까지 성공하면 금요일에 놀 수 있으니 학생 입장에서 좋고, 만약 본인이 금요일 밤이나 주말에 놀지 않고 언어학을 하겠다면 그것도 고무적인 일이니 말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실 채점을 월요일에 시작하면서 '너 목요일이 기한인에 금요일에 냈어. 감점이야' 이건 얼마나 쫀쫀한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deadline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제는 지양하는 분위기다 due 혹은 due date 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된다. 제출기한 그거 한 번 안 지켰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deadline은 너무 이상한 표현이다.
2. A is reserved
이건 내가 지금 학교에서 과정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컬쳐쇼크를 받은 것인데, A를 안 준다. 채점표(rubric)에도 B+ 맞는 답안의 특징 정도까지만 적혀있고 A는 평가자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다루어야 받는다 (go above and beyond 라고 한다).
한국에서 나는 삼류대학을 다녔기에, 한국의 모든 학교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의 채점은 '만점에서 시작해서 거기서부터 점수 깎기'에 가까웠다. 이렇게 채점을 하면,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냥저냥한 '안전한' 답변을 쓰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리스크를 지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교과서에 나온 내용만 복사-붙여넣기하는 게 최고일 것이다.
"A is reserved" 채점 체계에서, 학생이 만약 그냥 안전하게 교과서와 수업자료 안에서만 답변하겠다 하면 그것도 좋다. B+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A를 받으려는 욕심이 있다면 더 창의적이고 더 기발하고 out-of-the-box한 생각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답안에 분량제한을 두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창의적인 노력은 감점요인이 되지 않는다. 비록 사고나 논증이 무르익지 않아서 창의적 도전이 딱히 설득력 있는 답안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하여도,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이런식의 도전을 많이 시키는 것이 음운론 연구자를 키워내는 지름길이다.

3. drop the lowest
이것 역시 학생들이 리스크를 지고 창의적인 도전을 하도록 종용하는 방법인데, 가장 점수가 낮은 과제를 무시하고 나머지로 성적을 주는 것이다.
만약 과제가 5번 나간다면 그 중 4번만 채점에 사용된다. 이건 뭐 유명한 것이니까 딱히 설명은 생략.
그리고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drop the lowest two 도 가능하다. 만약 학기가 마무리될 무렵, 마지막 과제가 나가기 전이라면 정책을 lenient하게 바꾸는 방향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마지막과제를 하지 않아도 전체 점수에는 절대 페널티가 들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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