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운론 개론수업 중간고사 채점을 하고 있다. 사실 음운론이 무슨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신비를 다루는 것도 아닌데도, "음운론을 가르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 라는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죄다 헤매고 있으면 수업이 잘못되었구나 생각할텐데, 또 깨우친 학생들은 답변이 명료하다. 똑같이 가르쳐도 얻게되는 지식이 다르다. 그런 것을 보면, 가르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고, 스스로 고민하고 깨쳐야 하는 것들이 분명 있는 것같다.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할 수는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정보를 제시해줄 수는 있어도 음운론을 익히는 것은 각자의 몫인 듯하다.
한편, 나는 "설명은 쉽고 명료하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쉽게'와 '명료하게'는 때로 같이갈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쉽지는 않더라도 명료한 편이 더 낫겠다. 그래야 내가 제시한 설명을 보고 들은 후 (어렵더라도) 스스로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학생들이 자꾸 혼동하는 부분과, 그러한 부분 각각에 대해 내가 달아준 코멘트를 정리하는 것이 '명료한 설명'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혼동하기 쉬운 부분이니 아예 사전에 확실히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코멘트를 정리하는 것은 우선 나 스스로에게 명료해지기 위함이다.
논리: 말소리의 음운론적 관계를 밝힐 때, 논리적 전제와 결론을 반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음.
소리의 쌍이 있다 해도 분석 전에는 그 둘의 음운론적 관계(이음이니 음소니 자유분포니)에 대해서는 무엇도 말할 수 없다. 기초적인 음운론적 분석은 별 다른 게 아니고 그 소리가 어디에 나타나는지 출현환경을 보자는 것이다. 소리는 환경에 분포한다. 분포 양상을 보면 두 소리가 한 말의 다른소리인지(이음) 아니면 다른 말인지(두 음소) 판단할 수 있다. 그 반대가 아니다. 두 소리가 한 음소의 이음이기 때문에 상보적 분포를 보이는 게 아니라 || 상보적 분포를 보이는 걸 보고 이음이라고 (잠재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즉 논증에서 관측(근거)과 결론을 구분하자면:
- 근거: 상보적 분포
- 결론: 두 소리는 이음일 수있다.1 (그럼 어떤 이음이 기본형인가? 당연하지만 기본형 ≠ 음소형)
- 근거: 최소대립쌍의 존재
- 결론: 두 소리 서로 다른 음소
그리고 당연하지만 더 많은 자료가 주어지면 결론은 바뀔 수 있다. (나는 이런 문제를 아주 좋아한다) 제한된 자료에서는 상보적 분포를 보였는데, 자료가 추가되니 최소대립쌍이 관측되었다. 그렇다면 두 소리는 음소다.
곁다리로, "음소라고 논증할 때 최소대립쌍이 몇개 있어야 충분한 근거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 원론적으로는 '최소대립쌍이 체계적으로 분포함을 보여야 한다'이지만, 학부 음운론에서는 '두 소리에 대해 최소대립쌍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 두 소리는 서로 다른 음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표준이다.
용어의 사용: 어떤 용어가 무엇을 서술/기술하는지 혼동
중첩('overlap')은 말소리의 출현환경에 쓰는 말이다. 말소리 쌍이 출현하는 환경은 중첩되거나 혹은 중첩되지 않거나 한다.
상보적 분포 (complementary distribution)이니 뭐니 하는 '분포'는 두 소리의 출현 양상을 기술하는 표현이다. 하나의 환경은 분포를 가지지 않는다. 환경 하나를 두고 (어떤 소리에 대해?) 상보적 분포를 가진다라고 말하는 건 엄밀히 틀렸다. 두 소리가 상보적 분포를 보인다, 혹은 두 소리의 분포(즉 출현환경)가 상보적이다.
두 말소리가 출현하는 환경이 중첩되지 않으면 그 쌍은 상보적 분포를 보인다고 한다: 환경-비중첩 → 소리쌍-상보적분포. 물론, 두 소리가 정말로 상보적 분포를 가지는지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환경에서 각각 어떤 소리가 출현하는지를 보아야한다. 따라서 여기서도 모종의 추정이 존재한다. 환경이 중첩되는지 여부를 보고 안 중첩되었으면 '아마도 두 소리가 상보적 분포를 가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소대립쌍은 진공속에 있는 두 단어의 관계가 아니다. 얼핏 생각하기로, 언어학에서 개념에 독립적인 단어쌍의 성격 따위는 없다.
의미론적 예시를 학생들이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 적자면, '빨강과 파랑은 반의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컴퓨터와 파랑은 반의어'라고는 안 한다. 즉 '반의어 관계'가 성립하려면 어떤 측면에서 반대 (다른건 모두 같고) 라는 이야기를 해야한다. 빨강과 파랑이 반의어인 건 둘다 색깔을 지칭하고, 명사이며 순우리말이고 등등 많은 측면에서 같고 오직 한 측면에서만 반대이기 때문이다. 최소대립쌍도 마찬가지다. 맥락없이 '이 단어'와 '저 단어'가 최소대립쌍이다 라고 말하는 건 마치 '컴퓨터와 파랑은 반의어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어떤 측면(대상이 되는 소리)인지 말해야 한다.
덧: 기본형을 기저형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기본형(default form, 'elsewhere' form)은 이음들 가운데 가장 넓은 분포를 가지는 소리이다. 기본형을 곧 기저형으로 볼 수 있을까? 이것은 Teaching team 사이에서 말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엄밀히 기본형이 곧 기저형은 아니다. 심지어 Ganda의 영어 [l~ɹ] 차용 데이터셋처럼 학생들이 가지는 이런 상식을 깨기 위한 자료도 있다.2
그냥 "기본형이 곧 기저형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사람들끼리 말을 맞춰보아야 했던 이유는,
우선 어떤 눈치빠른 똑똑한 학생이 정확하게 저 질문을 했기 때문이고,

그 다음으로는 음운론 개론 수업에서 자질이나 음소 등의 개념 그자체를 얼마나 엄밀하게 가르칠 것인지 수준을 맞추고 강의자와 조교들이 모두 같은 소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we assume that the default form is what the underlyng quality is."라는 고정표현(?) 내지는 만트라(?)를 만들었다. 쓰고보니 무슨 타협의 결과로 나온 정치적 표현같은데 사실 이정도가 최선인 것같다. 기저에서 명시되는 정보는 최소한으로만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이렇게 가르쳤으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고 깐깐하게 걸고 늘어지면 난이도가 너무 높아지기 때문이다.
말소리의 음운론적 관계
0. 요약 말소리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말소리는 음운론적 관계 속에 있습니다. 음소는 말소리를 기반으로 쌓아올리는 허상이며 '개념'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음소는 물리적인 특성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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