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마 중복일지도 모르겠음. 그러나 딱히 붙일만한 제목이 없네. 말그대로 생각나는대로 쓰는 글이고, 아마도 나중에 비공개로 돌릴 듯하다.
지도교수님이 강의하는 동일 과목에 조교를 두 번째 하다보니 안 보이던 부분이 보인다. 제아무리 테뉴어 받은 교수이고 학과 커리큘럼 전체를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더라도, 과목의 강의자 맘대로 막 강의를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싶다.
우선 학생의 수준과 열정의 정도(?)가 아주 큰 제약이다. 선수과목(prerequisite)이 있는 과목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과목이라면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3학년 4학년 과목이면 언어학을 좋아해서 전공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열의가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학생들이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 자체가 적다.
수능에는 소위 '킬러문항'이라는 것이 있다. 실력자와 아닌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초고난도 문제를 의미한다. 물론 실제 수능 맥락에서는 실수하게 함정 파놓는 문제를 킬러문항이라고 하는가보다.
간혹 킬러문항을 중간고사에 한 문제 정도 내는 경우가 있다. 음성학 부분은 어렵게 내려면 엄청나게 어려워질 수 있다. 지엽적인 IPA diacritic을 물어볼 수도 있고, 조음음성학적인 매커니즘을 깊게 파고들 수도 있다. 심지어 아주 치사하게 Gramle 수준의 스펙트로그램 읽기를 요구할 수도 있고...
참고로 오늘자 Gramle는 아래와 같다.ㅋㅋㅋ
음운론 문항이 어려워지려면 진짜 은하계 밖으로 어려워진다. 음운론이다보니 난이도 있는 문제는 '논하라'는 문제인데, 대체로 가상의 입력형 도출형 쌍을 여럿 준다음 규칙순이나 제약서열로 '논하라' 라고 문제를 낸다. 난이도 높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사용가능한 제약들, 규칙들의 종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반대로 Post-nasal devoicing 같은 unnatural patterns나 Sour grapes pattern 같은 '퍼즐'을 입력형-도출형으로 주어도 난이도가 올라간다. 그 언어에서 유효한 변별자질의 목록을 고정해놓고 설명을 요구할 수도 있다. ([nasal] 쓰면 깔끔하게 나오는 데이터를 [nasal] 빼고 설명하라고 문제내는 것이 단골 차떼고포떼고)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학생들의 열의가 받쳐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학생들이 진짜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일 때 강의자도 신이 나서 어려운 문제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이지, 학생들이 너무 시큰둥하면 어려운 문제를 내지 못한다.
또한 학과 내 다른 과목들과의 관련성도 큰 제약이다. 만약 이 과목이 다른 과목의 선수과목이라면,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체크리스트같은 게 생기나보다.
마지막으로 통제불가능한 상황들이 마구마구 발생한다. 난 아직도 기억난다. 2020년 3월 어느 금요일에 수업을 딱 하고 있는 도중에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이 선언되고 있었다. "여러분 다음주까지 다 제출하세요. 주말 잘보내요 안녕!" 하고 헤어지고는 다시는 그 학생들 얼굴을 보지 못했다 😔 (코로나가 잠잠해졌을 땐 이미 학생들이 졸업함)
국경일이 이상하게 많이 겹치는 학기도 있다. 그럴 땐 진도를 참 급하게 나간다.
딱 봐도 가르치는 걸 재밌어하는 교수님들이 있다. 그런 교수님들한테 많이 배운다. 나는 강의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잘 하지도 못하니 흉내라도 내려고 노력하고 있음.
반대로 연구 성과로 빛이 나는 교수님들도 있다. 그런 교수님들한테도 많이 배운다. 타고난 '강의력'이 아니라 노력으로 강의를 하는 것인데, 아마도 나도 강의를 한다면 노력형으로 준비를 해야할 것이기 때문에 그분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배운다.
마지막으로 여담인데 지금은 은퇴하신 옛날옛적 한국 교수님들 중에는 참 부담없이 강의 들어가시던 분들도 있었더랬다. 지금에야 큰일날 일이지만 맘대로 충동적으로 휴강 때려버리면 학생들이 '좋아했었다'. 지금은 '등록금이 몇푼인데 맘대로 휴강하냐'고 학생들이 크게 항의를 할 것이다. 수업을 할 때는 진짜 샛길로 새서 한참을 헤매거나 모자를 썼느니 껌을 씹는다느니 학생 태도 트집잡아 화내거나 하곤 했다.
영단어 profess는 사실 confess처럼 '근거 빈약한 채로 무슨 본인의 신념이나 주장을 지껄이는' 뉘앙스가 있는 듯하다. 막 사랑을 고백하거나 신앙을 고백할 때 confess라고 하는데 그럴 때 막 통계적 근거를 대거나 논리적으로 논증하지는 않는다. 흔히 돈받고 뭘 하면 그것에 있어서 프로라고 하는데, 프로의 수준으로 confess하면 profess인가?ㅋㅋ 그런 면에서 말그대로 professor 본연의 의미에 충실하던 분들이라고 하겠다. 그런분들의 평가는 참 아리송했던 것같다. 재수강하는 4학년은 답안지도 안보고 A를 남발하고 나머지는 "답안지에 대고 선풍기 쐬었을 때 멀리가는 게 A"인 양 랜덤하게 점수가 나오곤 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실라버스대로 엄밀하게 매 수업을 나가고 원칙에 따라 투명하게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해진 것도, X세대분들이 강의자로 들어오시면서인 것같다.ㅋㅋㅋ 왜 옛날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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