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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대로

초청강연했던 이야기 (한글날 기념)

sleepy_wug 2025. 10. 9. 12:04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언어에 딱 맞춤인 문자체계를 가지는 것은 정말 복입니다. 음소와 문자가 대응되지 않는 언어들이 정말 많습니다. (예: /θ/ 음소를 가지고 있는데 문자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궁리하다가 "이 소리는 /t/랑 비슷한데 공기가 새는 소리가 나니까 t랑 h를 묶자" 해서 th라고 표기하는 언어)

 

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의 문자체계를 빌려 쓰다가 중간에 그걸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사례는 더 흔치 않습니다.

 

한글날을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한국어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한국어에 딱 맞춤인 문자체계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자체계를 재발견하고 언어학적으로 다듬은 20세기초 선배 언어학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문자체계 세미나에서 '한글'에 대한 초청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글날을 기념해서 그때 강연했던 게 생각나서 공유합니다.

 

"한글은 자질기반 음소기반 음절기반 문자체계라는데, 도대체 한국어는 뭔 케르베로스 같은 문자체계를 쓰는 거냐?" 같은 질문에 답하는 자리였습니다. 한글 자음이 어떻게 구성되고, 자음과 모음을 어떻게 모아 쓰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언어학/음운론 얘기로 한 시간을 다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한글을 읽게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구성 원리를 설명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역사 이야기를 좀 넣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했고 용비어천가와 홍길동전 등의 문학작품에 쓰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한국어를 적는 주된 문자체계로 자리매김했다.... 뭐 이런 이야기. 제가 강조하고자 했던 건 20세기 초에 한글이 재발견된 과정이었습니다.

 

창제는 조선초 세종대왕 때였으나 구한말 재발견되기 전까지 한글은 철저히 '한문보다 열등한 문자' 내지는 '보조적 문자'로 비하되었습니다. 물론 그 문자체계는 이두나 향찰에 비해서 많이 과학적이고 훌륭했으나, 많이 과학적이고 훌륭하다는 건 자격루나 칠정산(역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랏말쌈을 적는 문자가 훌륭한 것은 둘째 치고, 국가의 공문서와 법전 등 모든 주요 기록들은 여전히 한문으로 쓰였습니다. 그 훌륭한 문자는 그저 '입말 적는 글'(언문), '계집들이나 쓰는 글'(암클), '아직 한문 모르는 애기들 (혹은 애기 정도의 교육 수준을 가진 사람들) 쓰는 글'(아햇글)이라고 불리며 보조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한글로만 한국어를 쓰고, 한문은 다만 부차적인 체계로 사용합니다. 모든 신문과 공문서와 법전까지 대부분 우리말체의 한글로 나오고 한자는 단지 명사에 한하여 보조적으로 사용됩니다.

 

이렇게 문자생활이 180도 바뀌게 된 것은 지석영 선생님이 (우리)나라의 문자체계다 하여 '국문'이라고 이름 붙이고, 주시경 선생님이 '한글'이라고 부르며 중요하게 대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초청강연에서도 지석영 선생님과 주시경 선생님을 세종대왕보다 더 오랜 시간에 걸쳐 소개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언어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운론 연구자이기에 비록 '한글'이라는 강연주제에서는 벗어나지만 주시경의 연구 특히 '말의소리'가 가지는 위상을 침이 튀도록 강조했습니다.

 

 

한글은 한국어에 딱맞는 옷과 같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훌륭한 옷의 기초를 만드셨으나 소중함을 모르고 잘 입지 않았으나, 주시경 선생님은 그 옷을 재발견하여 바뀐 체형에 맞게 완벽하게 맞춤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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