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이번 글에서는 언어학 박사과정생으로서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묘사합니다. 2019년 11월의 어느 한 주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박사과정 진학을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하는지 감을 잡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한 목적이고, 부차적으로는 " 코로나 이전"이라는 아주 먼 옛날(?)의 제 일상을 기록해보고자 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목차
1. 2019년 1학기
북미는 9월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됩니다. 이 포스팅에서 묘사하는 2019년의 11월 역시, 9월에 시작된 학기가 한창 이어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지금 구글 캘린더를 보고 있는데, 구글 캘린더에 따르면 이 당시 제가 진행하고 있던 일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매우 바쁜 학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TAship (교육조교): 2학년 음운론 개론 과목의 TA였습니다. 강의가 화/목 오후 3시반부터 5시까지 있었고, 금요일에는 제가 20명 정도 되는 반 3개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오전 10시, 11시, 그리고 정오반 이렇게 세 반이었습니다.
- RAship (연구조교): 제 연구주제와 관련있는 연구실(lab)에서 조교를 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부터 정오까지 랩 미팅이 있었습니다.
- Coursework (강의듣기): 대부분의 박사과정은 크게 3가지로 구성되는데 학위논문/자격시험/coursework입니다. 2019년 1학기에는 coursework 의무를 위해 강의를 2개 듣고 있었습니다.
- 자격논문 작성: 제 전공인 음운론에 관한 자격논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 공동저자 논문 작성: 한국에 계신 교수님과 공저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 수영: 일주일에 두 번씩 저녁에 자유수영을 다녔습니다.
2. 일주일의 하루하루
2.1 월요일: 랩미팅, 연구방법론 수업 프레젠테이션
월요일 오전 11시부터 정오까지 랩미팅이 있었습니다. 랩미팅하는 곳은 집에서 고작 5분거리면 도착하는 건물에 있기 때문에, 아침 10시 50분에 집에서 나왔습니다.
랩 미팅은 PI(연구책임) 교수님과 랩 구성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일주일 간의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공유하는 모임입니다. 저 당시 랩은 매우 조촐했어서 대학원생 2명과 학부생 1명이었습니다. 큰 프로젝트에서 랩 구성원 개개인이 맡은 부분이 있는데,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업무는 아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막힌 지점, 해결책 모색 등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또한 랩 미팅은 milestone을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지난 주에 어디까지 했으니 다음 주 까지는 저기까지 진행하기로 정하는 것입니다.
보통 랩 미팅은 50분 안쪽으로 끝나는데, 이날은 한시간을 꽉 채워서 진행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아무래도 할 일이 많았던 시기였나봅니다.
랩미팅을 마치고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수업 발표준비를 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월요일에는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진행되는 3시간짜리 수업이 있었습니다. 언어학 연구방법론 수업이었는데, 세부분과에 국한되지 않고 언어학 전공 대학원생 모두가 알아두어야 할 교양(?)을 배우는 과목이었습니다. 상당히 실용적인 과목이었는데, 크게 두 가지를 다루었습니다: (1) 연구윤리 및 윤리위원회 심사 통과 전략, 그리고 (2) 자신의 연구를 언어학 외부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두 가지 모두 지금까지 매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11월 18일은 자신의 연구를 중학생 정도 수준을 대상으로 5분 간 발표하는 날이었습니다. 중학생 수준이었기 때문에 각자 준비물을 가져와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연구의 아주 세부적이고 이론적인 부분보다는 언어학 자체에 대한 소개나 흥미있을만한 일부를 소개하는 것이 초점이었습니다.
저는 차용어음운론 토픽으로 자격논문을 논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에서 똑같은 소리가 모국어가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어필했습니다. 아무래도 다문화국가이고 다양한 모국어를 장려하는 문화이다 보니까, '같지만 다르다' 혹은 '다양하다' 와 같은 방향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흥미를 느낀다고 합니다.
대본을 보지 않고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 전 오후 내내 대본 암기하느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수업에 들어가서 긴장한 채로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하는 사람 제외하고 나머지 대학원생(5명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들은 정해진 연령대의 청중 역할을 했습니다. 제 경우는 청중이 중학생 수준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설정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택배를 찾아서 왔는데, 아웃도어에서 쓸 수 있는 에어매트리스였습니다. 이걸 왜 샀나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담으로 몇 주 전 당근을 통해 이거 판매했습니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TA하는 음운론 개론 과목 교과서를 훑어보았습니다. 다음날인 화요일에 Office hour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학부 2학년 과목이라고 하더라도 예습을 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업 진도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학생도 힘들고 저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도 음절에 대한 진도를 나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분절음의 연쇄로만 공부하다가 상위단위를 구성하는 단계입니다. 2학년 수준에서는 음절과 성조를 다루고 나면 학기가 끝납니다.
2.2 화요일: Office hour, TA수업 참관하기
화요일 오후 12:45부터 1:45까지 제가 TA하는 과목의 office hour가 있었습니다. office hour는 학부생들이 부담없이 문열고 들어와서 질문할 수 있도록 TA가 상주하는 시간입니다. 교수님은 매주 2시간씩 office hour를 지정해놓고 있고,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 이 시간에 TA들이 돌아가면서 office hour를 개최(?)합니다. 이번 주는 제가 당번이었습니다.
코로나를 거치며 office hour는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추세로 바뀌었는데, 이 때만 해도 3-4명 앉는 빈 방을 빌려서 문을 열어놓고 학생들을 기다렸습니다.
보통 2-3명의 학생이 오는데, 이 날은 2명이 엇비슷한 같은 시간에 와서 두 사람의 질문을 한번에 해결해주었습니다. 두 명 다 1시 반쯤 들어왔는데, 거의 2시가 넘어서야 돌아갔습니다. 물론, office hour에 아무도 오지 않아서 혼자 방을 지키가다가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에는 office hour에 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는 아예 TA 3명이 모두 출동하여 반나절동안 큰 강의실에서 office hour를 열기도 합니다. 이때는 학생들이 아무때나 시간될 때 와서 질문을 하고 갑니다. 아예 죽치고 앉아서 거기서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을 바로바로 질문하는 '똑똑한' 학생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질문 있는 학생들이 다 돌아가고 2시부터 3시 반까지 그 방에서 제 공부를 했습니다. 다행히도 방을 빌린 사람이 없어서 제가 예약없이 쓸 수 있었습니다.
화요일과 목요일 3시 반부터 5시까지는 학부 2학년 음운론 본수업이 있습니다. 이번 학기 2학년 수업은 flipped classroom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경우, 개념 강의를 아주 짧게만 하고 학생들이 직접 문제를 푸는 시간을 오래 주는데, 강의실 자체도 둥근 테이블이 여러개 있고 거기에 학생들이 둘러앉아서 그룹 별로 과제를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TA 3명이 강의실 여기저기를 순회하며 학생들에게 말을 겁니다. 잘 되고 있니? 궁금한 것 있니? 등등. 그러면 학생들은 문제를 풀다가 질문을 하기도 하고, 힌트를 달라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이 강의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6천보를 금세 채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TA들도 수업 진행 과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궁금한 것을 부담없이 바로바로 물어볼 수 있기 때문에 더 좋을 것 같습니다.
2.3 수요일: Python 프로그래밍 수업
수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Python 프로그래밍 수업이 있었습니다. 언어학과-도서관학과-컴퓨터과학과 이렇게 세 개의 학과 대학원생들이 연합으로 듣는 수업이었습니다. 기말 프로젝트는 조를 짜서 본인의 연구에 쓸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Association for Computational Linguistics 저널 형식으로 그 프로그램의 퍼포먼스를 설명하는 페이퍼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NLP전공하는 학생과 같은 조를 구성했는데, 음운 이웃 개념을 이용해서 사용자가 입력한 소리의 연쇄가 어떤 언어인지 추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NLP 전공 학생에게는 language detection task여서 의미있는 프로젝트였고, 음운론 전공인 저의 경우에는 음운 이웃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12시 정오까지 수업을 듣고 나서 조원과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여담으로 기말 페이퍼 제출하고 나서는 둘이서 한국음식점에 가서 같이 밥먹는 정도로 친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조별과제를 하면서 조원들이랑 친해져서 같이 밥먹으러 가고 그랬던 것 같은데 (2000년대 중후반 이야기) 캐나다에서는 그런 적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녁에는 수영장에 갔습니다. 저는 학생이 아닌 staff로 분류되기 때문에 학교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이 무료였습니다. 이걸 처음 알게되어서, 수영장을 참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게을러져서 수영 안한지 오래됐는데 조만간 다시 수영을 시작해야겠네요.
2.4 목요일: TA 수업 참관, teaching team meeting, 튜토리얼 준비
목요일 3시반부터 5시까지 제가 TA하는 과목의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수업이 화/목 진행되기 때문에 목요일 오후의 루틴은 화요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Office hour는 화요일이라 수업 전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습니다.
5시에 수업이 끝나면 뒤이어서 교수님과 TA 세 사람이 미팅을 합니다. Teaching team meeting에서는, 튜토리얼 진행과 시험 채점이 주로 논의됩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문제에 대해 의논합니다. 학생이 질문을 했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경우나, 어떤 학생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알려주었다든지 하는 경우에도 이 미팅에서 공유합니다.
미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음날 진행되는 튜토리얼을 준비했습니다. 튜토리얼이 뭔지 그리고 뭘 하는지에 대해서는 '금요일' 섹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당시 저는 flowing document로 presentation하는 방식에 무척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에는 튜토리얼 자료도 html로 작성하였습니다. 지금은.... 다시 슬라이드 방식으로 회귀해버렸네요.ㅋㅋㅋ markup language로 수업자료 만드는 거 시간 오래걸려요.ㅠㅠ 1
Flowing document 방식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보고 계시는 블로그의 구성 방식이랑 유사한 것입니다. 흔히 ppt 등의 슬라이드 제시 방식으로 presentation을 하는데, 이는 구시대적이고 언어학 자료를 제시하는 데에 부적합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종이 문서처럼 자료를 준비하되, 디지털 환경에서는 '페이지'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페이지 구분없이 주르륵 이어지는 구성을 가지게 됩니다. Acrobat에서 몇 년 전부터 제공하기 시작한 Liquid mode역시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2.5 금요일: 튜토리얼
금요일은 튜토리얼의 날입니다! TA들은 통상적으로 20명 정도 단위의 소그룹을 전담해서 가르치게 되는데, 왜냐하면 강의들이 대형강의이기 때문입니다. 강의실에는 백 명 넘는 학생들이 강의를 듣기 때문에, 제대로 학습할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백 명 넘는 학생들을 20명 단위로 쪼개서 TA들이 맡아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2019년 가을학기 당시에 저는 3개의 반을 맡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총 60명의 학생들이랑 부대낀 것이죠. 금요일에는 이 소그룹이 한 시간동안 모여서 TA한테 질문도 하고 같이 문제도 푸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것을 튜토리얼(tutorial)이라고 부릅니다. 자연어처리 전공에서는 이걸 랩(lab)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튜토리얼을 어떻게 진행할지는 전적으로 TA의 재량이지만, 동료TA 혹은 교수에게 수업진행에 대한 코멘트를 한 차례 받습니다. 제 경우는 50분의 시간 중 15분에서 20분 정도 개념 리뷰를 해주고 그 와중에 학생들이 모르는 것 있으면 바로바로 질문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30분 정도는 응용문제를 몇 문제 같이 풀어봅니다. 3학년 이상 과목에서는 20명 학생을 다시 3-4명 단위 조로 나눈 다음 "자, 시간 줄테니 문제 풀렴" 해버리고 저는 쉬고 그랬었는데, 2019년 가을학기 당시에 제가 맡은 과목은 2학년 과목이라 그렇게 하지 않고, 제가 차근차근 단계별로 문제푸는 걸 보여주며 학생들이 잘 모르겠으면 질문하게 하였습니다.
50분의 튜토리얼이 이렇게 끝나고, 집에 갈 학생들은 집에 가고 질문할 학생들은 남아서 질문을 합니다.
저는 3개 반을 맡았으니, 매주 똑같은 걸 세 번 반복한 셈이네요.ㅠㅠ 10시, 11시 그리고 정오 이렇게 세 반이었습니다. 정말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존경합니다. (갑자기?) 매주 동일한 진도를 여러 반에서 반복하시는데 어떻게 안 지루해 하시나 신기해요.ㅠㅠ
그런데, 이렇게 반복하다보면, 의도치 않게 뒷시간 반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합니다. 학생들이 질문하는 것이 다 비슷비슷해서, 앞시간에 잘 답변하지 못했던 질문도 뒷반에서 똑같은 질문이 나오면 잘 답변해줄 수 있었네요.ㅋㅋㅋ
튜토리얼을 다 마치고는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오후에는 공저하는 교수님이랑 미팅이 있었습니다. 왓츠앱을 사용해서 통화를 했는데, 요즘처럼 Zoom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시기와 비교해서 정말 격세지감이 듭니다. 아예 옛날에 Skype 쓰던 시절도 있었는데, 2019년 가을학기는 Skype와 Zoom 사이의 과도기였던 것 같네요.ㅋㅋㅋ
3. 소감 겸 결론
막상 써보니 무척 긴 글이 되었네요. 사실 이 글은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작성되었습니다. 그만큼 공을 들였는데, 만약 단순히 '보시오' 하는 용도의 글이라면 공을 들이지 않고 막연하고 애매하게 대충 썼을 것입니다. 이건 다른 사람들 보라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저 자신이 '추억은 방울방울' 하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은 이 때처럼 치열하고 바쁘게 살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머쓱해집니다. 사실 당시 저는 만성적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 시기 한번 아주 크게 아팠던 적이 있었는데, 응급실도 못 가고 끙끙 앓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는 덜 열심히 살고 수면을 가장 우선시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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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이지만 연구자들이 latex 쓰는거랑 Microsoft Word같은 WYSIWYG 워드프로세서 쓰는거랑 어떤 게 더 효율적이냐 조사했는데, WYSIWYG 쪽이 더 효율적이었더래요. (근데 문서 작성과정에서의 만족도(??)는 latex 사용자 쪽이 더 높았다고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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