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음성학과 음운론의 차이는 관심분야가 어디냐에 따라 나뉩니다. 흔히 음성학은 언어의 '물리적인 부분', 음운론은 '심상적인 부분'을 다룬다고 말하는데 이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두 분야는 날이 갈수록 엄밀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인터넷 찾아보면 음성학과 음운론을 정의하며 그 차이를 설명하는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쓴 글]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두 분야의 차이를 엄밀하게 정의하기보다는 음운론을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그냥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아주아주 단편적인 인상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많은 경우 편견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2. 아주아주 단편적인 인상
2.1 음운론자의 방엔 신기한 책이 많고, 음성학자의 방엔 신기한 장난감이 많다.
음운론자 방의 아주 전형적으로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1. 책장 가득한 책들 2. 화이트보드 3. 더러운 책상 4. 1쓰레기. 책장에 있는 책들을 보면 진짜 신기한 제목들의 책이 많고 제본된 저널 논문이나 학위 논문들도 많습니다. 많은 경우 단순히 음운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통사론 책들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운론자들은 책도 잘 빌려줍니다. 2
반면 음성학자들은 연구실은 매우 깔끔하고, 좋은 향기가(?) 납니다. 무엇보다 재밌는 장난감이 많습니다. 파이프 같은 데 숨을 불어넣으면 조작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모음 비슷한 소리가 나오는 기계도 본적 있고, 의사선생님 진료실에 가면 있을법한 얼굴 측면 절단 모형(sagittal section)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음성학 랩에 가면 음향부스, 초음파도구 등등 신기한 것들이 많습니다. 음성학자들은 이런 도구를 안 빌려줍니다.(아마 방음부스나 초음파측정도구 등은 덩치가 크고 비싸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3
2.2 음운론자들은 정리를 잘 못한다.
아마도 편견일 수도 있지만, 음운론자들은 책상정리를 잘 못한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책상정리 뿐만 아니라 컴퓨터 파일 정리도 그렇지요. 그래서 뭘 자꾸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 얘기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도 했지요. "뒤죽박죽 책상이 뒤죽박죽한 정신상태의 징표라면, 빈 책상에 대해선 뭐라고 생각해야 하나?" 4
반면 음성학자들은 매우 정리를 잘하고 데이터도 아주 체계적으로 정리해둔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뭐 찾으면 곧바로 나올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데이터의 존재 양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음성학자들이 수많은 양의 데이터가 이미 구조를 이룬 채 존재합니다. 반면 음운론자의 일은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있는 데이터들을 연결하여 패턴을 발견하고 이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루는 데이터 자체는 구조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음향음성학자는 elicitation session 음성클립 수백 개를 모아서 하나의 폴더로 묶어 놓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혹은 조음음성학자가 하나의 음운현상이 나타나는 조음 데이터를 애초에 하나로 묶어놓고 일을 합니다.
반면 음운론자는 책이나 음성학 데이터가 여기저기에 있는데, 평소에 보지 못했던 패턴을 발견하고 그때 더 많은 데이터들을 여기저기에서 모아다가 일반화를 하고 분류를 만듭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여기저기에서 데이터를 꺼내 확인하고 다시 모으고 다시 흩어놓고 하는 절차가 빈번합니다.
물론 적어도 음운론자 중 정리정돈을 잘하는 분들이 여럿 계시기 때문에 '음운론자는 정리를 잘 못한다'는 지나친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2.3 음운론자들은 논쟁하고 음성학자들은 협업한다.
이건 아마도 음성학이나 음운론으로 대학원 과정을 거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음운론자들도 협업을 하고 음성학자들도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음운론의 경우 논쟁 '그자체'를 위해,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더라도 서로가 devil's advocate이 되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음운론자들은 세부주제에 대해 자신의 이론이 있고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고집이 있기도 합니다 (opionated되었다 라고도 합니다). 5
어쩌면 논쟁과 반박 그 자체가 음운론 연구에 있어서 협업이고, 그것을 통해 더 탄탄한 논리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내부에서는 모두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가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때에서야 외부로부터 반박을 당하게 되면 크게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음성학자들도 서로 논쟁하고 반박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데이터 수집과 처리를 포함한 연구 그자체에서 협업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음운론자들은 이런 종류의 협업을 음성학자들보다는 덜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논쟁하는 모습이 더 자주 보이는 것 같습니다.
3. 한국어와 관련된 일화
한국어 데이터와 관련하여 한 음성학자와 했던 이야기를 일화(anacdote)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어에서 장애음은 평음과 격음이 구분됩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어에서 '그림'과 '크림'은 최소대립쌍을 이루고 이는 /ㄱ/과 /ㅋ/이 구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6
전통적으로 한국어에서 평음과 격음은 음향자질인 성대진동개시시간(VOT)과 뒤따르는 모음의 음높이(pitch, F0) 차이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생 이후의 한국어 화자들은 평음과 격음을 구분할 때 VOT의 차이보다 F0 차이에 더 민감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Silva 2006) . 언어학 블로거 "언어학, 외국어, 金星" 님께서 praat을 이용하여 pitch를 조절해서 평음을 격음처럼 들리도록 만드는 포스팅을 쓰셨는데 7[글 링크] 바로 이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 음성학자와 음운론자가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예컨대 음성학자는 '음향적 자질 하나에 대한 구분이 희미해졌으니까 한국어에서 평음과 격음이 합쳐지는 거 아니냐?' 내지는 '한국어에서 다시 성조가 생기는 거 아니냐?'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반면 저같은 음운론 연구자는 영어 차용 과정(영어 단어를 한국어로 빌려오기) 에서 이 변화가 어떠한 음운론적 결과를 초래했는지(Kang 2008), 또 초래할지 8(Nam 2021)에 관심이 많습니다. 9
'음향적 구분 희미해지니 평음과 격음이 중화(더 이상 구분이 안됨)될 것 같다'는 음성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음운론 연구자인 저는 사실 잘 납득이 되지 않고 오히려 중화가 이루어진다면 '평음과 경음이 합쳐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두 뿐 아니라 어중에서도 평음의 경음화가 더 빈번해지고 있기 때문에 평음과 경음 사이의 기능부담(functional load) 차이는 줄어들고 있고, 이것은 음운론에서 중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입니다.
한편, 음성학자들은 애초에 차용 과정에 관심이 별로 없는 듯하고😢 차용어 음운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흥미가 없는 듯합니다. 하긴... 그분들은 다른 주제로 많이 바쁘십니다.
4. 결론
물론 음성학자다 음운론자다 하는 것도 이름표일 따름이고, 어느 종류의 일반화든 늘 그렇듯 연구자 개개인에 따라 맞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냥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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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OT Tableaux 있으면 아주 금상첨화죠 [본문으로]
- "성공한 음운론자는 한 때 실패한 통사론 학생이다"라는 말이 있는 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닌 듯 합니다. [본문으로]
- 저는 조음음성학 실험방법은 몰라서 초음파도구나 피실험자한테 설치하는 도구들은 다뤄본적이 없는데, 그래서 신기해 보이는 걸 수도 있겠네요. [본문으로]
- If a cluttered desk is a sign of a cluttered mind, then what are we to think of an empty desk? [본문으로]
- '악마의 변호인'은 일부러 트집을 잡거나 반대 주장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본문으로]
-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일화적 증거anacdotal evidence를 제시하는 것 역시 음운론자들이 좋아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음성학자들보다 확실히 음운론자들이 일화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물론, 일화적 증거가 어떤 논증의 결정적 증거로 작용하는 일은 없습니다. [본문으로]
- Silva, D. J. (2006). Acoustic Evidence for the Emergence of Tonal Contrast in Contemporary Korean. Phonology, 23(2), 287–308. http://www.jstor.org/stable/4420276 [본문으로]
- Kang, Y. 2008. Tensification of voiced stops in english loanwords in Korean. Harvard Studies in Korean Linguistics, 12, 179-192. [본문으로]
- Nam, S. 2021. The adaptation of English word-initial voiced stops in Korean: A diachronic approach. Studies in Phonetics, Phonology and Morphology 27.1. 3-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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