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1988년 한글맞춤법 이전에 표기상으로 구분되던 '-습니다'와 '-읍니다' 의 분포에 대한 글입니다. 곁다리로 율/률의 문제도 언급합니다.
막 40년 가까이 뒷북치는 글이 되겠네요.
목차
1.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설문조사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설문조사의 목적은 인간의 언어 이해와 인지 과정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data를 수집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설문은 정답이 따로 없읍니다. 그냥 여러분이 느끼는 대로 알맞은 난에 답하시면 설문조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핸드폰 저장공간 정리하다가 위와 같은 스크린캡처 파일을 발견했다. 옛날 논문의 일부인데, 부록으로 "설문지는 이걸 사용했노라"라고 인용한 부분이다. 저 부분을 읽고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저기만 스크린캡처를 했다.
핸드폰에 다운로드한 다른 무맥락 사진들이 궁금하다면...







이 논문은 1980년대에 나온 논문인데, -읍니다와 -습니다의 구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때 늙은이 말투 흉내내기 위해, 오늘날 표준어에서 '습니다' 쓸 곳에 죄다 "읍니다"를 쓰는 게 유행이었는데, 정작 1980년대에는 -읍니다/-습니다를 쓰는 때가 나뉘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이고 없읍니다 이다.
2. 아마도 애초에 모두 -습니다
내가 음운론 연구자이다 보니 추측하는 패턴은 이렇다. 표면형에서는 (2020년대의 한국어처럼) 모두 "습니다"로 실현되나, 앞에 나오는 어간이 ㅅ으로 끝날 경우 중복되는 ㅅ이 탈락되고, 이때 동사어간이 아닌 어미의 ㅅ이 탈락하는 것이기에 "습니다"의 이형태로서 "읍니다"(ㅅ제거형태)를 쓰는 것이다. 예컨대, "있" + "습니다" 가 발음될 때 ㅅ 하나가 탈락하는데 (진짜 탈락하는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일단 탈락한다고 하자), 이때 탈락하는 ㅅ은 "습니다"의 ㅅ이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르면 "습니다" 에서 ㅅ을 뺀 "읍니다"라고 쓰는 것이 맞다.
즉, "습니다~읍니다"의 이형태가 존재하고 이것이 음운적 환경에 따라 다르게 출현하는 것을 표기에 반영한 것이다. ㅅ이 탈락할 때 "읍니다"를 사용하는 건 타당하다. 만약 ㅅ이 진짜로 탈락한다면 말이다.
3. "-읍니다"의 실증적 지지
정말로 ㅅ이 탈락하는지 실험이 가능할 것이다. 동사어간 '없-' (부재)과 '업-' (등에붙임) 뒤에 각각 -습니다를 붙일 수 있는데, "없습니다" 와 "업습니다"의 실현에서 ㅅ의 발음을 비교하면 될 것이다.
/없-습니다/ 에서 ㅅ이 탈락한다면 "없습니다"와 "업습니다"의 발음이 같을 것이고, 내 직관상 그러하다.
문제는 표면형에서 두 발음이 결코 다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업-"의 ㅂ은 장애음이기 때문에 POT 장애음뒤경음화가 적용된다. 반드시 ㅆ로 발음될 수밖에 없고 그건 ㅅ이 생략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랑은 별개다.
다른 최소대립쌍을 찾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잇습니다 있읍니다 역시 발음이 같으나 마찬가지로 ㅅ이 POT의 trigger이다.
ChatGPT는 아예 이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한국어 데이터가 인터넷에 양이 적고 전산화가 진행되었을 때는 이미 -습니다 하나만 사용되었기에 이해가 간다)
아마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가 한국의 ㅅ의 음성학에 대해 이해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CB Chang 교수님 만나게된다면 한번 물어봐도 될까?)
4. 율/률 그리고 열/렬
2025년 오늘날 한국어에도 옛날 -읍니다/-습니다 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한자어 率과 列의 표기이다. 率은 확률(確率) 할 때 나오는 '률'인데, 때로는 '율'이라고도 쓴다. 列은 행렬(行列) 할 때 나오는 '렬'인데, 때로는 '열이라고 쓴다. 규범주의 상 분포는 아래와 같다.
- ㄴ을 제외한 모든 받침 뒤에서: -률 / -렬 (예: 확률, 손실률, 수집률, 행렬)
- ㄴ받침 혹은 모음 뒤에서: -율 / -열 (예: 지지율, 확진율, 순열)
물론, 두음법칙에 따라 어두에 나올 땐 '율,' '열'이다.
근데 재밌는 건 ㄹ 표기형인 -률/-렬도 표면형의 도출을 위해서는 /뉼, 녈/ 기저형 상정해도 동일한 표면형이 나온다는 것이다. 확률 [황뉼], 손실률 [손실률], 수집률 [수짐뉼]... 손실률의 경우는 /손실-뉼/ 에서 유음화가 적용되어 [손실률]도 도출된다.
그리고 ㄴ뒤에 쓰는 율열도 소위 ㄴ삽입으로 인해 확진율[확진뉼] 순열[순녈] 1
자, 이렇게 보면 렬/열, 률/율 의 패턴이 읍니다/습니다 랑 흡사하다. 아래에 대놓고 비교해보자.
/...ㅅ-습니다/ 일때 ㅅㅅ 연쇄니까 ㅅ하나 탈락시키기 위해 "습니다" 대신 "읍니다"를 쓴다. 표면형 발음은 사실 ㅅ소리 다 나옴.
/...ㄴ-뉼/녈/ 일 때 ㄴㄴ 연쇄니까 ㄴ 하나 탈락시키기 위해 "뉼/녈" 대신 "율/열"을 쓴다. 표면형 발음은 사실 ㄴ소리 다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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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수녈]과 [순녈] 사이에 변이가 심하다는 거 인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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