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약
외래어 '그리스도'의 존대자질과 의존명사 -님, 그리고 규범주의 언어관에 관한 흥미로운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았습니다. 공유도 하고 생각해보려고 포스팅을 팝니다.
목차
1. 그리스도? 그리스도님?
출처:https://www.facebook.com/share/p/18sCC2MQwX/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소위 한국의 엘리트라는 것들을 싫어한다. 이들은 멍청한데 오만하기 때문이다.
정식 출간된 새한글성경을 봤다. 이전 체험판에서는 ‘그리스도님’이라는, 직함 ‘그리스도’에 접사 ‘님’을 붙인 훌륭한 파생어를 사용해 번역을 했는데 정식 출간되면서 접사 ‘님’이 탈락하고 오직 ‘그리스도’라는 단어만 사용되고 있다. 이는 체험판이 선공개됐을 때 많은 엘리트 신학도들이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그리스도님’이라는 번역은 매우 훌륭한 번역이다(총신 교수님이 이 번역을 제시한 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비판자들은, 그리스도라는 단어에 이미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굳이 님을 덧붙이는 것은 언어의 경제성을 위반해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은 언어의 경제성을 위반하지도 않았고 오류도 아니다. 첫째로, 한국어 접사 님에는 존중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는 직분이나 역할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일반적 직함을 뛰어 넘는 특별하고 유일한 분이다. 특별히 유대교의 메시아적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님은 구분되어질 필요가 있다. 사족으로, 예수라는 이름에 님을 붙이는 건 유용한데 이는 다른 예수(여호수아)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중세의 천재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항상 the philosopher 라고 반드시 정관사 the를 붙여서 지칭했다. 정관사를 붙임으로써 일반성은 특별성이 되었다. 영어 정관사의 기능을 한국어 접사 ‘님’은 수행할 수 있다. 또한 한국어 접사 ‘님’에는 애정의 의미 또한 담겨 있다. 선생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존중의 의미를 함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호칭함으로써 존중과 더불어 애정을 추가적으로 나타낸다. 한국어 접사 ‘님’은 이러한 의미를 더해 주는 천재적인 번역이다.
둘째로, 이중 의미(double meaning)는 항상 오류와 비경제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의미의 반복은 강조나 구체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라는 표현에 비해 추가적인 의미를 생성한다면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은 언어의 경제성을 위반한 게 아니고 역시 동어반복도 아니다.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라는 표현에 비해 추가적인 의미를 생성한다는 것을 앞선 논의는 입증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은 오류가 아니며 언어의 경제성을 위반하지도 않았다.
혹자들은 영어의 예시를 들어 그들은 접사 ‘님’을 붙이지 않아도 그리스도님을 비하한 게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당위(ought to)는 가능(can)을 함의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위반한 지적이다. 영어권 사용자들의 언어에는 ‘님’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이 우리처럼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님’에 해당하는 단어를 Christ와 함께 사용해야 할 의무가 없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봐야 한다. 영어 성경은 항상 ‘Jesus Christ’, 혹은 ‘our Lord Jesus’’라고 이미 존중의 의미가 담긴 직함인 Christ와 Lord의 첫 글자를 항상 대문자로 표기함으로써 추가적인 경외심을 표현한다.
사실 그리스도 혹은 예수라는 표현을 쓰든, 그리스도님 혹은 예수님이라는 표현을 쓰든 개인의 자유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신학자 당신들은 본인 부모님 이름도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가? 만약 그렇게 부른다면…… 힘내라. 가정 환경이 불우했어도 당신은 성공했지 않은가? 결론이다. 그리스도라는 단어에 접사 ‘님’이 붙은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에는 오류가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라는 표현보다 더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권장되어야 할 단어이다.
페이스북 유저 Ji-Ho Choo님이 성경 번역할 때 '그리스도'에 의존명사 '-님'을 붙이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χριστός를 한국어로 차용할 때 "그리스도"라고만 쓰고 "-님"을 붙이지 않는 게 타당한가의 문제다.
Ji-Ho Choo님의 프로필을 보니 총신대학교 신학 전공이라고 나와있다. 목사 지망생이거나 이미 목사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본문 전체를 수정이나 강조 없이 위에 스크랩해왔다. 기독교 신학적인 건 잘 모르겠고,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부분만 아래에서 발췌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이론언어학을 곁들인.
여담이지만, 내 타임라인에 모르는 사람의 포스팅이 뜨는 일이 최근 빈번해졌다. 이 포스팅도 그런 식으로 타임라인에 떴다. 아마 '이름 뒤에 쓰는 의존명사와 언어변화'에 대한 글을 페이스북에도 공유하고 하다보니 알고리즘을 타서 추천으로 뜬 것같다.
내가 의아했던 지점은 아래의 5가지다. 이제 각 지점에 대해 원글을 인용하고 내 생각을 조금 덧붙이고자 한다.
1. 외래어도 존대자질을 가지는가?
2. 언어의 경제성이 대체 뭐길래?
3. 의존명사 '-님'의 자질 (유일성? 존대 의미 더하기?)
4. 반복은 강조와 구체화?
5. 언어표현을 이리저리 강제해도 되는가?
2. 질문들
2.1 외래어도 존대자질을 가지는가?
답: 가질 수 있다.
존대자질은 한국어의 일치에 관여한다. 한국어의 '-시'는 주어 명사의 존대자질 유무에 따라 출현이 결정된다. 주어가 존대자질을 가지지 않은 명사인데 '하시다' 라든가 '주무시다' 등의 동사를 사용할 수는 없다. 똑같은 표현이나 주어가 다른 아래 (1a) 와 (1b)를 비교할 때, 주어가 신생아와 같이 존대자질을 가지지 않는 명사일 경우 '주무시다'는 비문이 된다. 또 한가지 주지할 점은 '-님' 유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1) 존대자질 일치
a. * 지금은 시간이 늦어 신생아는 주무십니다.
b. 지금은 시간이 늦어 선생은 주무십니다.
c. 지금은 시간이 늦어 선생님은 주무십니다.
또한 '-님'을 붙일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관찰이 있다. 내 직관상 '*신생아님'은 어색하지만 '선생님'은 아주 좋다. 즉, '-님'은 존대자질을 가진 명사에만 부착될 수 있는 것같다.
우리의 관심은 외래어도 선생, 선생님처럼 사용될 수 있는지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아래 스크린캡처처럼, 외국 인명에 '-분'을 붙인 사례가 있었다. '-분'이 '-님'보다 사회언어학적으로 한정된 용례(즉 젊은 세대에 한정됨)를 가진다는 점에서 '-님'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도'는 코이네 그리스어 χριστός의 간접차용으로 여겨진다. 신약성경이 코이네 그리스어 L2화자들에 의해 서술되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χριστός의 발음은 [kʰristos], "크리스또스"로 예상된다. 뒤에 -os 가 헬라어 남성명사의 주격표시자이므로 어간은 "크리스또." 한글성경이 20세기 초반에 작성되었다고 한다면, p-mapping에 따라 가장 가능성이 높은 차용형이 "그리스도"이고, 이것은 사실에 부합한다. 찾아본 결과 기독교 성경의 번역은 중국어 성경을 통한 간접번역이라고 하는데, 중국어 음차인 "기독"과 더불어 원어에 가까운 "그리스도"가 양립하는 것은 흥미롭다.
어쨌든, 정리하자면 '그리스도'는 차용어이고 차용어도 존대자질을 가질 수 있다. "-님"은 존대자질 가지는 명사에만 붙을 수 있다. 그러나 '-님'의 사용은 강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님" 모두 가능한 형태이다.
덧붙여, '그리스도'는 간접차용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원어에 충실한 표현이라서 차용어음운론자로서는 놀랄 일(아주 희미한 기억 속에 <음성음운형태론연구>에 성경 내 인명 차용 양상에 대한 논문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나면 여기에 추가할 것)
2.2 언어의 경제성....
언어의 경제성이 대체 뭔가 싶어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한국어 글쓰기, 특히 번역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아주 고약한 개념인 것같다. 즉, 동일한 '의도'면 최대한 잉크 사용을 절약하라 뭐 이정도인데, 아주 규범주의적인 개념이다. 언중들을 선도하는 무슨 선구자 엘리트 느낌이 강하게 나는데, 언어의 경제성을 지키려면 화용적인 측면에서 지킬 일이지, "-님" 붙이기와 같은 통사/형태론에 이걸 들이대는 건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만 강조하건대, 언어는 경제적으로 작동한다. 중요하니까 한번더 말하자만 언어는 경제적으로 작동한다. 촘스키의 Strong Minimalist Thesis와 Flemming (1995)를 필두로 한 언어보편적 음소인벤토리 구성 가설을 예로 들 수 있다. 1
Strong Minimalist Thesis는 인간의 통사부가 접면 조건에 대한 최적해이라는 주장이다. 접면 조건이라 함은 한쪽으로는 C-I 2접면, 그리고 다른쪽으로는 A-P 접면을 말한다. C-I 접면은, 거칠게 말하면 언어 밖의 인간 인지 전반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Conceptual-Intentional interface였는데 왠지모르게 다들 약어를 사용한다. 반대로 A-P 접면은 말소리 만들고 알아듣는 것과 관련된 접면이다 (Articulatory-Perceptual).
여담의 여담이지만 용어를 LF, PF였다가 C-I, A-P 였다가 왜자꾸 바꾸는 건지 의아하긴 하다. 기존 용어의 의미를 수정하는 방식도 가능할텐데 말이다. 마치 교과서 판갈음할 때 챕터 구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는 것처럼, 서로 다른 프레임워크를 구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통사론 전공자가 아니라서 자세한 사정을 모름.
Flemming (1995)의 UCLA 논문은 "여러 언어들을 보자하니 언어가 인지능력과 의사소통의 역학적 관계에 따라 조성되더라. 여기 증거들." 이런 내용이다. 예컨대 언어의 음소 인벤토리는 몇 가지 인지적/의사소통적 제약들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최대한 경제적으로 구성된다. 아래에 고모음 인벤토리 예시를 통해 보자. Graff (2012)에서 정리한 표를 인용한다.
일단 고모음 음소는 [i ɪ ɯ u] 등이 있다.
Maximize Distinctness는 음소들이 존재하면 그것들 사이에 음성적 구별이 최대한 되어야 한다는 개념적 제약이다. 고모음 2개를 음소로 사용하려면 [i, u] 이런식으로 최대한 구분되게 만들어야지 [i, ɪ] (둘다 비원순전설고모음) 이런식으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실증적으로도 이런식으로 구분 안되기 비슷한 소리들로 고모음 인벤토리를 구성하는 언어들은 없다.
Minimize Effort란, 기왕이면 음소 구분을 하지 말자는 거다. 한국어의 역사언어학을 보면 ㅐㅔ가 음소로 변별되었는데, 이거 구분 안하고도 기능적으로 크게 영향이 없으니까 그냥 합쳐버리는 방향으로 진행중이다.
Maximize Number란 반대제약인데, 음소개수가 많이 존재하는 실증적 언어 상황이 이것의 반영이다. 의미변별 등 형태론적 필요에 따라 음소는 여러개여야 하는데, 정확히 X개 음소 등의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최대수.
비슷한 논지로, Clement (2003)는 "언어보편적으로 음소 인벤토리를 구성할 때에는 정해진 음소개수를 구성할 수 있는 최소자질로만 인벤토리가 이루어진다"라는 일반화도 있다. 이를 Feature Economy라고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언어는 자질을 최대한 아껴쓴다(?)는 것이다. 음소가 2개 필요하다? 그럼 자질 1개로 구성한다. 음소가 4개 필요하다? 그러면 자질 2개로 끝낸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CORONAL] 음소가 4개 필요하다 했을 땐, 그 어떤 언어도 /t,s,z,tʰ/ 이런식으로 랜덤하게 음소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실증적 발견이 있다. 방금 예시한 랜덤 인벤토리에서는 [continuant] [spread glottis] [voice] 이렇게 3개의 자질이 사용되는데, 이는 비경제적이다. 만약 [CORONAL] 아래의 음소 4개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두 자질의 양극값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spread glottis] [voice] 이렇게 2개만으로도 /t, d, tʰ, dʰ/ 이렇게 구성할 수 있고, 실제로 인간언어들이 이렇게 한다. 3
요약하자면 인간언어(통사부와 음운부)는 주어진 맥락에서 알고리즘적으로 최적해를 찾는다. 통사부의 경우 C-I 접면의 요구조건과 A-P 접면의 요구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구성되고, 음운부는 기능과 인지 사이의 줄다리기에서 둘다 만족시키는 (혹은 둘다 불만족시키는?ㅋㅋㅋ) 최적해를 찾는다.
물론 이 모든 게 다 "그리스도"에 "-님"을 붙이는 게 맞냐 안 붙이는 게 맞냐라는 소소한 논쟁에는 하등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님을 붙이니 안붙이니는 통사부 의미부에서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예: 선생(님)께서 오셨군요). 음운부는 물론 상관 할리가 없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선생께서 오셨군요"가 잘못됐고 "선생님께서 오셨군요"가 맞다고 우긴다면, 아무리 언어학적 개념을 발라 떠들어댄대도 삐빅! 규범주의자입니다. 일 따름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님 붙이면 잘못됐고 안 붙이는 게 맞다" 역시 그냥 규범주의다.
여담으로 규범주의 기술주의 뭐 이렇게 써놓으니 사회주의 자본주의 이런식으로 무슨 두 이념의 충돌 이런식으로 보이는데, 그게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언어는 누군가가 꼴리는대로 맘대로 갖고 놀아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다."라는 생각이면 그게 기술주의다.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궁금하다"라는 자세가 기술주의다. "다른 사례들을 통해 규칙을 일반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에 따라 이 샘플은 이렇게 예상된다"도 기술주의다. "...야 되므로, 표현은 ....여야 한다" 이건 규범주의다.
2.3 '-님'의 기능과 의미
인용 (파랑으로 표시):
"첫째로, 한국어 접사 님에는 존중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이름에 님을 붙이는 건 유용한데 이는 다른 예수(여호수아)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중세의 천재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항상 the philosopher 라고 반드시 정관사 the를 붙여서 지칭했다. 정관사를 붙임으로써 일반성은 특별성이 되었다. 영어 정관사의 기능을 한국어 접사 ‘님’은 수행할 수 있다. 또한 한국어 접사 ‘님’에는 애정의 의미 또한 담겨 있다. 선생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존중의 의미를 함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호칭함으로써 존중과 더불어 애정을 추가적으로 나타낸다. 한국어 접사 ‘님’은 이러한 의미를 더해 주는 천재적인 번역이다."
"예수라는 이름에 님을 붙이는 건 유용한데..."라는 대목에서 조금 의아했다. 얼핏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문제는 "그리스도님"과는 다른 문제인 듯하다. 예수=여호수아 인가본데,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여러명이 나오는지도 궁금하다. (내 상식 상 한 명일 것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항상 the philosopher 라고 반드시 정관사 the를 붙여서 지칭했다. 정관사를 붙임으로써 일반성은 특별성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영어로 저술했는지, 그리고 영어 정관사의 여러 기능 중 이때의 기능이 '특별성'(?)의 표시자인지는 일단은 논외로 하자. 사실 엄밀히 이때의 특별성 개념과 존경의 개념을 어떻게 변별할지 모르겠다. 추측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the 사용은 (정말 그가 영어를 썼다고 가정하고) 맥락없이도 작동하는 한정성이나 대표성을 표시하는 듯하다. (전자라면 태양을 the Sun 이라고 표현하듯, 맥락없이도 "그 철학자"라고 한정 가능. 후자라면 철학자 중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 현대영어로 친다면 Mr Philosophy 정도의 표현)
"영어 정관사의 기능을 한국어 접사 ‘님’은 수행할 수 있다." 나의 한국어 직관이 엉망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님"은 대표성 한정성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듯하다. 맥락없이 "선생님이 오셨어요"라고 말하면 당연히 이어지는 질문을 "어느 선생님?" 일 것이다. 사실 "선생이 오셨어요"랑 크게 다르지 않다. 대표성을 표시할 수도 없다. 만약 "그리스도님"이 대표성을 가진다고 한다면 그 대표성의 출처는 "그리스도"에서 나오는 것이지 (고유명사) 결코 "-님"에서 나오지 않는다. 맥락없이도 지금 당장 내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했던 말이다"라고 말한다면, 인류역사상 수많이 있었을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 중 상대성이론의 특정 인물이 대표된다. 님을 붙이든 말든 그러하다. 이는 그 인명에서 오는 것이다.
한정성은 어떠한가? 이것은 표준적 테스트가 있다. 비한정적 문장 뒤에 테스트하고자 하는 한정성 표시 문법장치를 넣은 문장을 잇달아 쓰는 것이다. 문장1은 맥락을 제공하고 문장2가 맥락 내에서 지시대상을 한정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영어의 예를 들자면 "I read a book yesterday. The author seemed to be a cradle Catholic." 그리고 "I read a book yesterday. ?An author was a cradle Catholic." 처럼 반드시 한정성 장치 The 를 사용해야만 한다. An author는 좋지 않다(infelicitous)하다.
한국어의 지시표현 "그"는 한정적 의미를 가진다. "어제 어떤 책을 샀어. 그 저자 모태신앙인 모양이더라." 아주 좋다. 그럼 비한정적 표현 쓰면? "어제 어떤 책을 샀어. ?어떤 저자 모태신앙인 모양이더라." 문장2가 비한정적 주어를 가지면 어색하다.
이 지식을 가지고 동일 맥락에서 "그"와 '-님'을 적용해보자.
(2) '-님'의 한정성 테스트 I
a. "어제 어떤 교실에 가봤어. 그 담임선생님 좀 이상하더라"
b. "어제 어떤 교실에 가봤어. 그 담임선생 좀 이상하더라"
(2a)와 (2b) 두 문장 모두 좋다. '님'을 붙이든 안 붙이든 한정적 의미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앞서 한정적 "그"와 비한정적 "어떤"을 대조했을 때 판단이 분명했던 것을 기억해보자.
(3) '-님'의 한정성 테스트 II
a. ???"어제 어떤 교실에 가봤어. 어떤 담임선생님 좀 이상하더라"
b. "어제 어떤 교실에 가봤어. 담임선생 좀 이상하더라"
(3a)와 (3b)는 "그-어떤"과 "님-∅"을 비교한다. -님이 한정적 의미를 지닌다면, 3b는 3a와 같이 비한정적이어서 어색해야 하는데, 어색하지 않다. 물론 나는 내 직관을 신뢰할 수 없지만, 그런의미에서 이 글을 읽을 한국어 화자들의 직관도 궁금하다.
"선생님이라고 호칭함으로써 존중과 더불어 애정을 추가적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님"이 추가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님"의 화용적 기능에 대한 논증이 없는 건 아니다. Kim and Sells (2007)이 대표적인데, "-님"을 부가하느냐 하지않느냐에 따라 미세한 화용적 의미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의 강력한 데이터 중 하나는 존대일치가 화용적 맥락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문법적 일치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Kim and Sells는 이때의 -님 이 "애정"이라기보단 그 정반대의 기능을 가질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데이터를 제시한다. "똥멍청이님께서도 오셨겠지요" 같은 것인데, 비아냥거리거나 농담하는 맥락이다. 4
어떤 문법장치가 두 기능을 가진다. 애정을 나타낼수도 비아냥거림을 나타낼 수도 있다. 언제 무슨 기능을 하는지는 맥락이 결정한다. 라는 상황이다. 이때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맥락이 기능을 결정한다"라고 결론지어야할 것이다. 실제로 Kim and Sells (2007)의 가장 큰 주장은 한국어 존대일치가 '선택적이며' '문법장치가 아니고' '화용적장치'라는 것이다. 정말로 "맥락이 결정한다"로 수렴된다.
2.4 반복은 강조와 구체화?
"둘째로, 이중 의미(double meaning)는 항상 오류와 비경제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의미의 반복은 강조나 구체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라는 표현에 비해 추가적인 의미를 생성한다면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은 언어의 경제성을 위반한 게 아니고 역시 동어반복도 아니다.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라는 표현에 비해 추가적인 의미를 생성한다는 것을 앞선 논의는 입증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님이라는 표현은 오류가 아니며 언어의 경제성을 위반하지도 않았다."
언어의 경제성이 무슨 원리인 양 위반하니 안하느니 하는 지점에는 동조할 수 없지만 "반복은 강조화 구체화"라는 주장은 흥미롭다.
(그리고 스리슬적 "형식적 반복"과 "의미적 반복"을 교묘하게 맞바꿔서 논증한다는 지점을 언급할 만하다. 논제는 '-님'이라는 형식요소를 붙이느냐 마느냐인데 사태가 마치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한다. 다시 말하는데 효도해야 한다" 라고 써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인 양 교묘하게 바꿔놓는다.)
음운론의 조화(harmony)와 통사론의 조응(concord)은 반복에도 불구하고 강조나 구체화가 없다. 음운론이야 의미에서 한 30km쯤 떨어져있으니 논외로 친다 해도 통사론의 조응은, 동일 요소가 짝맞춰 나와도 의미적으로 무엇도 부가되지 않는 사례들이다. 부정조응이 아주 연구가 잘 되어있다. 아래는 스페인어다. 부정어 No와 마찬가지의 부정어 nadie가 동시출현한다. 그래도 "나는 진짜로 정말 아무랑도 말하지 않았다" 를 의미하지 않는다.
(4) 스페인어 부정조응
No | habl-é | con | nadie |
NEG | speak-PST.1SG | with | nobody |
나는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다 |
음운론 통사론 모두 개별 단위를 초월하는 해당 요소를 관장하는 node를 상정해서 설명한다. 음운론의 경우 조화를 위한 tier를 분절음을 초월하여(supersegmentally) 상정한다 (주의: 음운론 연구자의 매우 음운론적인 설명입니다.)
앞서 한국어에서 높임/존경은 일치(동시출현 의무)현상이라는 전제를 소개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뭔가 반복된다면 통사론의 조응을 생각하는 게 타당해보인다.
물론 아래 예문들이 존대성 정도에서 차이를 가진다는 아주아주 미세한 의미적 직관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Kim and Sells 2007 이 이런 류의 예문들을 들었던가?) 이정도의 직관은 사실 수사(stylistics)이지 언어가 아니다. 어찌되든 상관이 없다.
선생님이 왔다.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께서 오셨다.
2.5 아주 그냥 동네북
아주그냥 한국어가 만만하니까 이래저래 규범적 드라이브를 걸어대지.ㅋㅋㅋ 또한 언어학은 잠자코있으니 그냥 동네북 취급인가보다. Ji-ho Choo님의 첫 문장을 차용해서 말하자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소위 한국의 개신교 신학자들을 싫어한다. 이들은 멍청한데 오만하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서 개인적인 이유로 싫은소리를 별로 적지는 않지만, 굳이 이 문장을 쓰고 또 글을 쓰는 이유는 솔직히 좀 개인적일지도 모르겠다.
왜 들러붙는지 모르겠는데, 나한테 달라붙어서 "내가 언어학을 좀 아는데" 하며 이상한 소리하는 한국의 개신교 목사가 한둘이 아니다. "아저씨, 그거 서지학이에요. / 그건 번역이지 언어학이 아니에요" 넌지시 얘기해도 잘 듣지 않는 듯하다.
사실 언어학(특히 음운론)은 기독교 신학에 빚진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음운론자라면 누구나 익숙할 말그대로 IPA 표준 폰트인 Doulos 폰트는 사실 기독교단체에서 만들었고 이름역시 기독교 용어이다. (아래 코퍼스에서 언급되기도 하겠지만 '몸종' 내지는 '노예'라는 뜻으로, 초기사도들이 스스로를 낮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고 지칭한 데에서 유래한다) 지금은 학계에서 많이 자제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비교언어학 데이터베이스 Ethnologue 역시 기독교 계통 단체에서 선교목적으로 만든 데이터베이스다.
이것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확장에 기독교가 가장 앞장섰기 때문에 가질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의존성이다. 지금 우리가 채록하는 데이터들은 현대의 윤리적 감각에 따라 원주민들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그 당시 수집된 언어데이터가 반드시 윤리적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터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의존한다 (주의: 연구자에 따라 상당히 의견이 갈리는 부분임. 윤리적으로 수집되지 않은 데이터는 사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어떤 제정신인 언어학자도 신학적 논리나 종교에 대해 뭐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의 일부 신학자들은 언어에 대해 쉽게 말하나? 심지어 언어표현의 당위를?
3. 코퍼스
마지막으로 χριστός 를 기존의 성경 번역에서 어떻게 번역했는지 관찰 해보자. 왜냐면 첫 걸음은 늘 관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님이 무슨 자질 이런 개소리 하기전에 실제 그 장치가 어떤 양상으로 사용되는지 머리를 차게 하고 봐야 할것 아니겠는가.
사용역(register)의 영향을 고려해서 "그리스도"가 기술문(description)에서 사용된 마태복음서 1장1절과 서간문에서 사용된 로마서 1장 1절을 고려할 것이다.
각각 원어로는 아래와 같다. 1904년판 코이네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공개되어있어서 거기서 찾아왔다. https://sites.google.com/site/nestle1904/
마태 1 1: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ε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우리의 관심인 "예수 그리스도" 부분은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로 나타나는데, -οῦ 접미는 속격(-의)을 나타낸다. 또한 아래 나열될 한글번역본과 대조하여 주지할만한 점은, 한글번역에서 "아브라함 - 다윗"의 순으로 나열되는 것에 비해 Δαυεὶδ - Ἀβραάμ (다윗 - 아브라함) 순으로 나열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 [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ε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 이렇게 위계를 지닌다고 파싱한 다음, 위계 상 위에 있는 아브라함부터 제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 1 1:
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
공교롭게도 여기서도 속격을 사용했지만, 격과 존대표현 사용 간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지 회의적이기 때문에 일단 짚어두기만 하고 넘어갈 것이다.
3.1 1887년 예수셩교젼셔: -님 없음
마태복음서 제1장이다. (편의상 띄어쓰기를 넣었다)
"압라함의 자손 다빗의 후예 예수 키리쓰토의 족보라."
이번엔 로마서 1장 1절이다. (마찬가지로 띄어쓰기는 내가 넣었다)
"예수 키리쓰토의 죵 보로(파울로스)는 볼오물(부름을) 밧드러 몸뎨쟈(몸제자: 사도)되여.."
3.2 사사성경 (1910): -님 없음
마태복음서 제1장이다. (편의상 띄어쓰기를 넣었다)
아바람의 자손이시오 다위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3.2 셩경전셔(1911): -님 없음
마태복음서 제1장이다. (편의상 띄어쓰기를 넣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셰계라
3.3 셩경개역(1938): -님 없음
마태복음서 제1장이다. (편의상 띄어쓰기를 넣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셰계라
3.4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1961): -님 없음
여기서부터는 이미지파일이 아닌 디지타이즈된 판본이 존재한다! 대한성서공회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마태복음서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로마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3.5 공동번역 (1977): -님 없음
마태복음서 1장 1절: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3.6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1991): -님 없음
가톨릭 성경 홈페이지에서 가져왔다.
마태오 복음서 1장 1절: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절: 나 바울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3.7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1993): -님 없음
마태복음서 1장 1절: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3.8 성경 (2005): 모호함
마태오 복음서 1장 1절: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3.9 쉬운말성경 (2015): -님 없음
주의: 어느 기독교 파에서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음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3.10 새한글성경 (2024): 모호함
마태복음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 곧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분의 출현의 기원에 대한 책.
로마서1장 1절: 바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부리시는 종입니다.
3.11 정리
어떠한 한글판본도 압도적으로 "그리스도님"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2005년 가톨릭 성경과 2024년 개신교 새한글성경은 조금 애매한데, [예수 그리스도] 절에 할당하는 존경자질의 표출 -님 존재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다만 공교롭게도 "그리스도 예수" 순으로 어순이 나타나기 때문에 -님은 절의 마지막, "예수" 뒤에 붙어서 "[그리스도 예수]-님"이 된다.
4. 결론과 여담
결론을 내리자면, 번역을 '그리스도'라고 하든 '그리스도님'이라고 하든 어떠한 차이도 없으나, 어떤 형태를 사용해야 한다고 되지 않는 개념어 들먹이며 몰아붙이는 건 "멍청한데다 오만"해 보인다. 한편, 지난 100년 간의 성경 번역 전례들을 돌아본다면 '-님'을 붙이지 않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여담으로 성경번역 외적이지만, 1997년 주교회의 이후로 가톨릭 전례에서는 호격으로 그리스도가 사용될 경우 '-님'을 붙이는 것같다. 따라서 대연도에서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가 되고, 기독교의 유명한 기도문인 Kyrie(퀴리에) 역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로 번역된다. 아래에 한국 천주교 미사통상문의 키리에를 인용한다.
그러나 2005년 나온 가톨릭 성경에서도 이러한 관습을 따르지는 않는 듯하다. 아마도 기도 등에서 예수를 대상으로 '부르는' 맥락에서만 '-님'의 사용이 지지받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할 경우 '-님'은 높임받을 대상일 때 사용하는 호격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 존칭호격조사
a. 선생님! 이거 보세요.
b. **선생아! 이거 보세요. (cf. 선생아! 이거 봐라.)
c. *선생! 이거 보세요. (cf. 선생! 이거 보게.)
(5)에서 예시한 것처럼 한국어에서는 대상의 존칭자질에 맞도록 호격조사를 달리 사용해야 한다. (5b)는 체언에 호격조사를 붙여 썼지만 호응되지 않기에 비문법적이다. 호격조사를 쓰지 않은 (5c)도 비문법적이다. 다만, 뒤에 오는 "보다"의 활용에서 "봐라" 혹은 "보게" 등 높임 기능이 없는 경우에는 좋다.
-님 을 호격조사로 보는 것은 나의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양대 서정수 선생님(가톨릭 신자이시기도 하다)이 쓰신 기고문에서 아래와 같이 쓰신 바 있다.
제가 알기로는 현대의 언어 생활에서는 극존칭 대상자에게는 「님」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상례입니다. (...) 예를 들면, [아주높임 호격의 경우] 「시여」나 「이시여」를 붙이지 않고 「님」 「선생님」 등을 써서 부르는 일이 많습니다. 「회장님, 김선생님, 신부님, 수녀님」과 같이 말입니다.
(...) [중세 국어 극존대 호격 -하] 형태는 근대 국어에 와서는 사라지고 「님」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임금님」 「부처님」 「부모님」등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안병희/이광호 <중세국어문법론>)
국어사적인 측면에서 볼때, 우리선조들이「주여」「천주여」와 같은 호칭을 쓴 것은 이해할수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성경과 기도문을 우리말로 옮기었던 19세기 경에는 극존대 호격조사 「하」가 거의 사라지고 「여」형태가 높낮이에 관계 없이 두루 쓰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어에 이르러 서는 이런 호격 조사 사용에 변동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님」이나 「시여」등이 발달되어 극존칭 대상자에게 쓰이고 「여」는 그보다 아래의 인물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또한 「아」나 「야」는 그보다 더 아래사람을 가리키는 데 쓰이게 되었습니다. (...)
(...) 우리도 이제는 바른 경어법을 써서「주여」 「천주여」를 지양하고 「주님」「천주님」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스도」나 「마리아」와 같은 경우에는 「님」을 불여 부르는 것이 다소간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하오나 이 경우도「그리스도님」「마리아님」과 같이 써버릇하면 얼마 안가서 익숙해지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라는 호칭이 이미 우리 귀에 익은 것처럼 말씀입니다.
출처: 1991년 가톨릭신문 기고문
마지막으로, 이러한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내가 이 블로그 포스팅을 올린 걸 본 독자들 중 이미 예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외래어'스럽게' 생긴 단어에 -님 을 붙이는 건 부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물결21 코퍼스를 찾아보면 예수님, 부처님의 빈도는 높아도 그리스도님의 빈도는 낮고 석가모니님은 용례가 검색되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서정수 선생님의 기고문에서도 1991년 당시에 (당위적으로) 호격조사 -님을 붙여야 함이 타당하나 '그리스도님'이 "다소간 어색하게 느껴진다" 고 하셨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성경에 나온 그리스도+호격 이 실제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는 다음글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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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emming, Edward S. (1995). Auditory Representations in Phonology. (PhD dissertation). UCLA. [본문으로]
- 라이프니츠가 생각나네 "지금 세상이 가능한 최적의 세상" [본문으로]
- Clements, G. N. (2003). Feature economy as a phonological universal. In Proceedings of the 15th International Congress of Phonetic Sciences (pp. 371-374) [본문으로]
- Kim, Jong-Bok & Peter Sells. 2007. Korean honorification: a kind of expressive meaning. Journal of East Asian Linguistics 16(4). 303–3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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