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도입
30대 중반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결코 세대론의 신봉자가 아니었습니다. 세대론은 그저 '갈라치기'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하는 데에는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득이라면 그저 '흥미', 가장 큰 실은 '선입견'). 무엇보다 어느 사회건 세대보다 계급/계층이 더 확실한 설명요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커버린 Gen Z를 자주 대면하는 입장에서, 요즘은 세대 간 차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내가 속한 밀레니얼 세대와 Gen Z가 다른 지점들을 자꾸 직면하다보니, Gen Z가 가진 특이한 지점 뿐만 아니라 내 세대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대학에 막 입학한 어린 Gen Z들과, 사회/인문학 계열 전공하는 고학년 Gen Z들을 매일같이 대하는 밀레니얼의 입장에서 바라본 Gen Z의 단편적인 특징들을 메모합니다. 우리 밀레니얼 세대가 정체성으로 시작해서 정체성으로 끝난 세대라면, Gen Z는 여러 개인을 묶어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identify)하는 젠더 등 모든 정체성(identification)에 대해 관심을 덜 가지는 듯합니다. Gen Z는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자신의 개별성을 설명하는 데 능숙합니다. 타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에티켓도 이전세대와 Gen Z를 구별하는 특징인 듯합니다.
목차
1. 젠더 의제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줄었다
Gen Z들의 말과 생각을 들어보면 상당히 재밌는 게 젠더 의제들에 대해 관심도가 무척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세대에서 가장 화두였던 것이 (그리고 사회가 발전하는 방향이) 모두 젠더와 관련된 이슈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유독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양성평등이 이루어지지도, 성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이 없어지지도 않았는데, 이슈를 이끌어갈 동력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생각이면 Gen Z가 야속하기도 하다. 이러한 면에서는 다소 보수적/반동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밀리니얼]에겐 희망이 없다"고 욕하며 Gen Z가 (선동을 통한 망상적 반미주의를 포함한 그들 식의) 사회진보의 희망이라고 칭송하던 김용민을 생각하면 1[링크], 그 치들에게는 오히려 쌤통이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차별과 폭력의 기반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젠더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즉, 우리 뿐만 아니라 차별과 폭력의 집행자들 역시 젠더이슈에 민감해서, 그걸로 차별의 논거로 삼았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헤겔적일 수 있는데, 마치 군중 OX게임을 하듯, 젠더의제와 미투라는 깃발이 올려지고 나서야 니편 내편 나뉘었던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라면, Gen Z가 이 게임 자체에 참여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일면 고무적이다. 그렇게 되면 젠더이슈의 backfire하는 차별 집행자들 역시 슬슬 그만 참여할 것이기 때문. 비슷한 예시로 트위터에 떠돌았던 민담(?)인데, 이런 게 있다. 젠더의제 찬반(?) 게임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 '할머니'가 오히려 쿨했음.
2. 존중과 설명
부끄럽지만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자신과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 능숙하지 않았다. 편을 나누고 누가 우리편이니 누가 우리편이 아니니만 열심히 판단했다.
이에 비교해서 Gen Z들은 아예 편이라는 개념자체가 흐릿해진 것 같다. 또한 본인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그걸 존중하는 데에도 능숙하다. 어쩌면 파편화되다 못해 개개인이 그냥 독자적인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Boomer와 Gen Xer들은 밀레니얼들을 두고 각각 다 다르고 또 동시에 쉽게 깨져버린다고 Generation snowflake라고들 하시던데, Gen Z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단단해진 snowflake들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너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어짜피 개개인은 다 다르다고 공리적으로 받아들인다면 TERF 등 gender-critical movement는 지지받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의바르다
Gen Z들이 무척 예의바른데, 이게 내가 밀레니얼이기 때문에 걔네들이 나를 대하는 게 어려워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세대가 유독 예의바르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앞선 섹션에서 언급했듯, 본인의 정체성 (성정체성이든, 계급정체성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본인의 세계관과 다른 이야기를 할 때에는 본인의 세계관을 내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우리세대가 우선 개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고작해봐야 성정체성에 대해서만 아주 broad한 분류로 말함) 무엇보다 세계관이 충돌하면 그냥 입을 닫아버리는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다른 예의바름의 사례가 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참고가 될만한 visual을 보여주기 위해 내가 찍은 사진이나 혹은 폰에 다운받은 자료를 찾을 때가 있다. 그러려고 폰이나 컴퓨터로 저장경로에 접근하려고 하면 Gen Z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다. 마치 비밀번호 입력할 때 시선을 돌려주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Gen Z들은 대화상대가 본인 기기에서 뭘 찾으려 할 때 시선을 돌려주는 게 예의인가보다. 그리고 절대로 타인의 폰을 가져다가 보지 않는다. 본인 눈앞에 직접 화면을 들이대어주어야 하고, '줌인해주세요'라든가 말하면 내가 줌인을 해준다. 결코 타인의 폰에 손을 대지 않는다. 이건 내가 처음 겪었을 때, 그 친구만 유별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사례가 예외없이 이어지다 보니, Gen Z의 특성이구나 하고 일반화하게 되었다. 아마도 타인의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존중해주는 것이 Gen Z의 공감대인 것같다. 어쩌면, Zoom meeting 등, 눈앞에 공유되는 visual에 대해 본인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게 체화된 걸지도 모르겠다.
4. 시대에 대한 인상이 묘하게 어긋난다
이것은 딱히 Gen Z만의 특성은 아니고 세대 차이의 일반적 특징일 것 같은데, 동일하게 경험한 시간들에 대한 인식이 묘하게 어긋난다. Gen Z와 밀리니얼은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같이 경험했다. 그런데 그 시대에 대한 기억이 묘하게 어긋난다.
꽤 유명한 트윗이 있다. [링크] 2001년생인 Billie Eilish가 "난 그 세대가 아니라 컴퓨터 타자치는 게 낯섦" 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실제 했던 말 자체는 "타자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이고, 트위터리안 사이에서도 타자치는 교육이 있었느니 없었느니의 논쟁이 있는 듯하지만, 아마도 Billie의 의도는 "컴퓨터보다 폰이 더 익숙함"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Gen Z들은 분명 2000년대를 겪었고, 그땐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었다. 이 시대에 대한 호명이 전혀 없이 마치 자신들이 Gen Alpha인 양, 태어났을 때부터 스마트폰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정말 신기하다. 또한, DVD (특히 'DVD대여'라는 개념), 소리바다, Napster 등등 2000년대 혹은 2010년대 초반의 문화적 양식들을 모두 20세기의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도 신기하다. Gen Z가 인식하는 시대개념에서는 스마트폰의 보급이 한 2001년도 쯤 이루어지고,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문화양식들은 모두 19xx 의 것으로 생각되나보다.
가장 인식의 부조화가 나타나는 지점은 2000년대부터 2010년 중반까지의 산업미학 조류였던 skeuomorphism에 대한 인식이다. 솔직히 밀레니얼로서 나는 skeuomorphism에 대한 별 감정이 없다. 그저 미학적 유행이 바뀌는 과정 중의 하나로 느껴질 뿐이다. 토이스토리나 동키콩 게임 등 1990년대 말에 이미 있던 정서가 그대로 개인용 컴퓨터 (특히 Windows Vista) 로 이전된 것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Gen Z들에게는 skeuomorphism 자체에 대한 향수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Gen Z들이 skeuomorphism을 promote해서 Web 2.0 Gloss라느니 Frutiger Aero라느니 칭송하는 건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다. 특히 Frutiger Aero라는 키워드로 Gen Z들이 유튜브에 엄청나게 많은 설명 영상들을 올리고 있는데, 하나같이 노스텔지어를 표현하는 점은 정말로 흥미롭다.
물론 Gen Z들이 skeuomorphism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좀 피식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컴퓨터를 처음 쓰게 되었고, 그래서 현실의 사물과 최대한 유사하게 UI를 구성해야 했다"는 지점은 절대 공감할 수 없다. 실상 컴퓨터를 처음 쓰게 된 것은 (방금 말을 뗀) 너희 세대들이었단다.
물론 Gen Z들의 '착각' 내지는 '오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우리세대도 비슷하다. 1980년대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례로 내가 '망상'하는 1980년대 초중반은, 민주화 세력과 군부세력이 매일 시가전을 벌이는 듯한 이미지이다. 2000년대 이후 담론을 점령한 x86세대들이, 고작 전 인구의 10%가 되지 않았을 대학 운동권의 '설화'를 후속세대에게 주입시킨 결과이다. 한국의 x86세대 역시 비슷할 것이다. 그들에겐 6.25 전쟁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그 윗세대에게는 피난의 기억이 있을텐데.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조습 작가의 <습이를 살려내라> 라는 작품이 있다. 아래에 사진으로 제시했다. 1987년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구호가 우리 세대에게 느껴지는 거리감만큼, 2002년 월드컵의 "대한민국" 구호가 Gen Z에게 느껴지는 거리감이 있을 것이다.
5. 결론
언어학 '안'하고 있는 글이었다. 아마도 이건 이 블로그에서 거의 유일하게 언어학과 연관지점이 전혀 없는 글일 듯하다. 이 글을 쓰게 된 구체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이라 적기가 꺼려진다. 아마도 이 글의 대표이미지에 충분히 담겼으리라 생각한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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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에 오고, 인문학을 전공하겠다고 선택한 사람이다 보니 '공정'(fairness)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데, 그 감각이 우리 세대와는 조금 다른듯하다. 거칠게 말하면 우리 세대의 공정이 교정적 과정적 의미를 가진다면, Gen Z가 생각하는 공정의 개념은 상태적인 개념인 듯하다. 예를들어 실정법의 범위에서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소극적 정의에 동조하는 느낌. Jeff Bezos의 편법탈세에 대해 Gen Z들은 덜 비판적이고 (세법 상 허용되는 절세), 아마존의 노동착취 문제에 대해서도 (실정법 상 위반하는 사항이 없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도 아예 일을 안하는 것보다 나은 상태이므로 정당화됨) 비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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